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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ul 03. 2022

자존심은 넣어둬

슬기로운 직장생활

새로운 거래업체와 1년간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다. 상부의 컨펌을 받았으니 서비스 이용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날인하면 된다. 업체로부터 계약서 초안이 왔고 내가 검토한 바 큰 문제없다고 판단되어 팀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팀장님은 검토해보겠다고 하시고는 팀 내에서 굵직한 계약업무를 담당하는 나와 동급의 동료에게 내가 올린 계약서 초안을 넘기시며 내용을 체크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음.. 뭐지..? 나는 내 업무 영역에서 담당자로서 검토하고 팀장님께 보고를 한 것인데, 그게 왜 다시 내 동료한테 가는 거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계약서를 읽어보시지도 않고 저 친구에게 검토를 맡기시네. 순간 내 마음 저 아래에서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의식되었는지 동료는 조금 머쓱해하며 알겠다고 서류를 받아 들었고 그 사이 내 기분은 조금 구겨졌다.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일수록 일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이 나이와 경력에 기분이 나쁘다고 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 자존심을 망가트리는 일이다. 이미 지시는 내려졌고, 나는 동료와 내용을 다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갑작스러운 지시로 본인의 업무와 연관도 없는 계약서를 시간 내어 검토해야 하는 내 동료의 수고를 아깝지 않게 해야 한다. 살짝 구겨졌던 마음을 속으로 쓱쓱 쓸어 펼치며 나는 동료에게 서류 보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 주고 편하게 의견 달라고 했다. 검토 끝나면 같이 리뷰하며 내용 보완하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한 뒤 그가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나도 다시 한번 계약서를 찬찬히 보았다.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첫 번째에서 못 봤던 장면을 보게 되는 것처럼, 다시 보니 좀 더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이 보였고 수정하면 좋을 문구도 보였다. 내가 대수롭지 않은 형식상의 계약서라는 인식을 깔고 적당히 훑어봤었다는 사실을 직면했고, 초반에 담당자랍시고 동료에게 서류가 넘어가는 것에 내심 기분 나빠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동료의 빨간펜 첨삭이 쏟아질 것 같아 벌써부터 창피했다.


동료의 검토가 끝나고 잠시 미팅하며 리뷰를 했다. 다행히 수정사항이 쏟아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동료가 많이 짚어주었고 보완하면 좋을 부분에 의견을 주었다. 자신의 의견이 내게 불편함을 줄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듯했고 나는 미안함과 민망함이 뒤섞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업무를 모르는 것 때문에 적합하지 않았던 일부 의견은 내가 설명하여 정리했고, 나도 동의한 의견은 반영하여 내용을 수정하고 다듬어서 빈틈을 줄였다. 한결 나은 결과물을 얻게 되어서 나는 oo님 검토받길 잘한 것 같다고, 보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내 입장에서 느끼기에 순서가 조금 틀어진 것일 뿐 만약 팀장님이 내게 그 동료와 내용 한번 더 확인하고 올리자고 하셨으면 나도 흔쾌히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팀장이라고 모든 업무를 다 아는 것이 아니므로 좀 더 디테일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채널을 한번 더 거치라고 하는 것은 업무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지시였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불쑥 올라온 어쭙잖은 자존심을 앞세웠더라면 나와 업무에 결국 실이 되었을 것이다. 내 기분을 내려놓고 업무를 우선으로 생각한 내가 다행스러웠다. 앞으로도 일에서 감정을 분리하고 기분에 따르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노력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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