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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Feb 21. 2024

어쨌든 해피엔딩

업무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업무일지를 쓴다. 엑셀로 한 달, 한주의 업무를 기록으로 남기다 보면 일은 연속되고 반복되므로 자연스레 곧 해야 할 업무, 다가올 일들에 대한 스케줄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습관 한 지 수년 이 지나니 뭔가 중요한 것을 빠트리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업무일지에 쓰는 것도 생각이 들어야 가능하다. 이거 해야지 그다음은 이거. 머릿속에 생각이 되어야 손으로 기록해 놓을 수 있다. 열심히 업무일지를 써도 사람인지라, 간혹 중대한 사항을 까맣게 놓치고 있다 목전에 벼락같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지조차 하지 못하다가 펑크가 나버리면 속수무책인데 늦더라도 머리에 떠올라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순간엔 눈앞이 하얗게 번지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어지러워진다.  



최근 임원분의 베트남 출장 항공권을 진행해 드렸는데, 그분의 비자가 만료되었고 새로 발급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출발 3일 전에 인지한 상황이 있었다. 아, 아, 아.... 안돼. 어째 이런 일이?!!


한국 여권을 가진 한국인은 베트남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고, 최대 45일까지 체류가 가능하다. 2022년까지만 해도 최대 15일 체류였고, 무비자로 베트남 다녀온 후 1개월 이내에는 다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관광객 유치 활성화를 위해 베트남 정부에서는 외국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비자제도를 개선했다. 덕분에 한국인은 무비자로 자유롭게 베트남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여권을 소지한 미국 국적자는 규정이 달랐다. 온라인 비자든 여권에 부착된 비자든, 유효한 비자가 있어야만 베트남 입국이 가능하다. 그 임원분은 미국 국적이었다... 한국 국적인 대부분의 직원들이 아무 구애받지 않고 베트남을 왔다 갔다 하니 비자에 대한 인지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항공권은 진작 완료해 놓고 비자를 잊고 있었다니. 이 분이 비자가 없어 출장을 가지 못하는 상황은 내 위신이 추락할 일이었다.



베트남 온라인 비자는 신청한 날로부터 보통 3 영업일 후에 발급된다. 온라인 프로세스이지만 경험 상 주말에는 처리되지 않았다. 만약 목요일에 신청하면 화요일에 발급되는 식이다. 월요일 출발이라서 전 주 금요일까지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화요일 오후에 머리로 벼락 치듯 생각이 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부랴부랴 비자를 신청했다.


비자가 발급되어야 할 금요일. 하필 개인 사정이 생겨 오후 반차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임원분의 베트남 비자에 꽂혀 있었다. 업무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도 비자는 프로세싱 중이었고 계산 하루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없는 어떤 문제로 온라인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머리로는 분명 오늘 발급될 같은데 혹시 하는 불안을 떨칠 없었다.


여행사 직원분께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이런 경우 옵션이 있을지 문의했다. 직원분은 빠르게 현지 파트너에게 연락하고 필요한 사항을 안내해 주었다. 물론 이 방법은 '급행'이라는 단어가 붙고 현지 업체를 동원하는 일이 되어 비용이 상당히 높았지만 출장을 못 가서 발생하는 손실에 비할 수 없었다. 다만 이것도 할지 말지를 빠르게 결정해야 진행 준비를 할 수 있었고, 결정한다면 바로 비용으로 이어지니 되돌릴 수 없어 망설여졌다. 온라인 비자가 나온다면, 괜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 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계속 온라인 비자 사이트를 확인했다. 5분~10분 사이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고 있는데, 간절함이 통했는지 딱! 눈앞에 완료 메시지와 함께 비자파일이 나타났다. 오,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여행사 직원에게 연락해 온라인 비자가 나왔다고 알리며 급행 서비스를 취소하고, 신경 쓰게 한 것에 죄송함을 전했다. 직원분은 다행이라며, "어쨌든 해피엔딩"이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어쨌든 해피엔딩.


이 한 마디갑자기 뭉클했다. 

사실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 엔 왜 미리 챙기지 못했을까, 정신을 어디다 두고... 하며 혼자 끙끙댄 내가 있었다. 내 마음을 그 한마디가 스르륵 녹여주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해 준 직원분이  고마웠고, 덕분에 '그래. 어쨌든 해결되었으니 된 거야. 괜찮아.' 하고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에피소드를 예로 들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매일 나에게 오는 크고 작은 해피엔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문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내가 외면하거나 손을 놓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해결되고 정리된다. 과정이 힘들어 깨닫지 못해도, 상황이 정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해피엔딩임을 이번에 느꼈다. 오늘 잘 지냈다면, 그 또한 해피엔딩이다.  



*사진: Unsplash의 Madison O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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