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을 앞둔 아들과 사회생활 23년 차 엄마의 대화
아들과 나는 한 번씩 긴 대화를 나누곤 한다. 녀석은 마치 고양이처럼, 조용히 혼자 지내다 한 번씩 안방에 들어와 우리 부부 침대에서 잠시 뒹굴거리곤 하는데 보통 그때가 대화의 시간이 된다. 딱히 주제랄 건 없고 아이가 왔을 때 표정을 살피며 내가 상태를 물으면 대답하고, 아이 역시 나의 상태를 물으면서 시작된다.
"어서 와. 배고프니? 뭐 하면서 지내고 있어?"
(아이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종합크리에이터..? 가 꿈이다.)
"운전면허 학원 다녀왔고, 7시에 보컬 수업 있어요. 엄마는요? 엄마는 뭐 하고 계셨어요?"
일찍부터 대학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아이였기에 곧 사회로 나가야 하는 길목에서 나는 아이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피고, 앞으로 삶의 방향을 찾아갈 때 그리고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얘기들을 조금씩 해주는 편이다. 내 생각대로 아이를 설득할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너 앞으로 뭐 하며 살 거냐는 식의 꼰대 잔소리처럼 하면(그렇게 말하는 타입도 아니지만) 안방 근처는 얼씬도 않을 것이다.
구시대를 살아온 내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말이 현시대의 아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 동안 깨달았기에, 요즘 시대의 큰 범위에서 나에게 와닿은 명언이나 문장, 그와 연결한 내 고민과 생각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해주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것을 매개로 이야기했을 때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았다.
아들과 내가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은 이제 처음 세상으로 나가는 아들과 23년 차 사회생활 중인 내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마흔에 접어들 무렵부터 직장생활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현생에 지쳐 별로 진전된 것은 없지만 그만큼 새 출발을 준비할 시간은 더 줄어들었고 수시로 드리우는 불안함과 싸우고 있다.
직장을 벗어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하려면 하겠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지금 첫출발을 하려는 이들이 할법한 고민을 나 역시도 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더불어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직장생활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불안,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 급변하는 세상과 너무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야속함... 같은 것들이 마음을 괴롭히곤 한다. 사십춘기의 시간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아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 상태를 마치 고민 상담하듯 아들에게 내어놓게 되는데, 고맙게도 아들은 그런 내 얘기를 상당히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담은 조언을 건넨다. 아직 세상을 모르니 현실적인 조언이 아니라 내 마음 편해질 방향의 긍정적인 조언이지만 그것대로 나는 위로받고 힐링감을 얻는다. 말하다 울컥해서 내가 눈물을 비칠 때도 있었으니까.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머릿속에 생각이 많고 혼자 복잡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순수하게 던지는 말이 가슴에 깊게 와닿을 때 말이다. 물정 모르는 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조곤조곤 말해주면 그 자체로 나는 감사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최근의 그런 대화 중에 아이는 내게 꽤 단단한 어조로 말해주었다.
"엄마, 엄마는...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요.
거인은 거울 앞에서 자기를 볼 수 없대요.
엄마가 이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오... 순간 나보다 큰 아이가 나를 품에서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람이라는 말을 그렇게 멋지고 다정하게 해 주다니.
아이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는 자기만의 북극성이 있고 나는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에, 일찍이 북극성을 찾았다는 아이를 의심했었다. 그게 진짜 북극성이 맞을까, 하기 싫은 것 안 하려고 쉽게 하나 고른 가짜는 아닐까.
그러나 이 또한 나의 구시대적 생각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이는 중학교 2학년 무렵 결정한 자신의 진로를 지금까지 변경하지 않고 유지하며 살을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그 하고 싶다는 분야의 대학을 경험했으면 싶었지만 아이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부모라고 하여 그것을 강요할 수 없었다. 대학은 선택 사항이고 원치 않으면 가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한 그 삶을 독립적인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면 된다.
10대 때 자신의 북극성을 찾은 아이와 40대 중반에 나의 북극성을 찾고 있는 엄마는 이렇게 대화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아이의 북극성은 어떤 모습으로 아이를 이끌까. 나는 언제 어떤 북극성을 찾게 될까. 우리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