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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an 21. 2021

인생역전 게임

학부모인 나의 속내를 마주하다 

요즘 일요일 오후 1시간 정도는 둘째와 놀아주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주는 숨바꼭질, 풍선놀이, 좀비 놀이, 의자놀이 4종을 짧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1시간 놀아주었다. 

체력이 가능할 때 놀이를 시작하면 내 속에 감춰져 있던 장난기가 발동하여 꽤나 재밌게 같이 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자지러지게 웃는지, 어떻게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지 익히 알기에 그 포인트를 적절히 공략한다. 소리치며 웃고 땀까지 맺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마음 한편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번에도 몸을 좀 쓰겠거니 싶었는데, 오랜만에 인생역전 게임을 하자고 했다.

인생역전 게임은 부루마불과 비슷한데, 주사위 대신 룰렛을 돌리고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옮기며 말판에 따라 돈을 벌고 잃기도 하고 월급 또는 건물을 지어 월세도 받으며 목표지점까지 도달하는 게임이다. 중간중간 인생역전 카드를 뽑는 칸이 있어 뜻밖의 역전 묘미를 느낄 수도 있다.(최고는 잘 쌓아놓은 상대의 인생과 내 인생을 체인지하는 것!) 인생역전카드 중에는 역전로또도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일부 반영된 놀이다. 



오랜만에 게임을 시작하며 보니 출발점에서 조건을 정하도록 되어있었다. 

조건은 두 가지다. 대학을 진학할 것인지, 취업에 뛰어들 것인지. 

정말 현실적이구나. 딸아이가 고민하며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디로 할 거야?


나의 대답이 딸의 머릿속에 닿기를 바라며 상당히 구체적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대학을 갈 거야. 어린 나이에 취업을 바로 시작하면 힘들어. 학생으로서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더 배우고 취업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요즘 대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던가...)


"그래? 그럼 나도 대학 가는 걸로 해야지."


게임을 시작하고 네댓 칸 나가면 직업 선택하는 칸이 나오고, 직업카드를 블라인드로 각각 1장씩 뽑는다. 나는 영화배우를, 딸은 과학자를 뽑았다. 월급은 총 3단계로 높아지는데, 과학자가 영화배우보다 3배 높은 초봉으로 시작해 3단계까지 모두 다 높았다. 나는 또 딸아이에게 닿도록 힘주어 말했다.


"와. 역시 공부 많이 해서 과학자 되니까 월급이 진짜 높다! 월급 많이 타겠다~ 공부가 중요하긴 하구나."

(영화배우가 과학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하는데 왜 과학자에 힘을 주었을까.)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방향을 알려주고 조언하며 도와주는 부모이고 싶다. 그런데 아이여야 할 그 '원하는'의 주체가 어느 틈에 내가 되고 있었다. 큰 아이가 꿈을 요리사로 바꾸었다는 말에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던 나, 초3 과의 인생역전 게임에서 대학 진학과 공부 많이 한 직업을 강조하던 나를 마주하면서...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 학부모라는 사실을 받아 들 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사회는 그랬다.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이 좀 더 앞서 출발하는 구조. 대학을 가고 졸업해야 사회통념적 기본의 출발 선에 발을 댈 수 있었다. 실업계, 요즘은 특성화고라고 하는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친구들이 사회와 조직의 차별에 상처를 안고, 얼마 못가 공부를 더 하겠다며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수차례 목도하면서, 한국사회는 역시 대학 나오고 볼 일이다라는 인식이 나의 내면에 각인되었을 수도 있다.


모순되게도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지만 정작 교육열이 높은 엄마는 아니다. 알아서 마음 잡고 잘하길 바라기만 하지, 아이들 공부에 열 올려서 학군 챙기며 세밀하게 체크하고 준비하고, 학원 선생님과 수시로 상담하고 시험 준비가 어떻게 되는지 성적이 나쁘면 왜 이렇게 나왔는지 묻고 챙기는... 그런 디테일은 생기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현실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모습만 상상하는. 그렇게 이상만 높여서 현실과의 괴리로 힘들어하던 나쁜 습관이 일정 부분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김영민 교수의 저서인데, 인생 전반의 공부에 대한 내용이 참 위트 있게, 접해본 적 없는 시각으로, 와 닿게 잘 쓰여있다. 공부 에세이라는 것도 나에겐 신선했는데, 이 책의 초반 10~11페이지에 있는 구절로 아이 미래에 대한 내 불안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은 일찍부터 입시에 정열을 바친다는 점에서 교육열이 강한 나라이지만, 진정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육에 냉담한 나라이기도하다.

.... 진학에 성공한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선물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급 학교 진학에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대가는 혹독하다. 삶의 노역이 대물림되는 상태, 즉 노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 과정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경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이제 이 땅의 많은 의자왕들과 젊은 국민들은 입시나 취직 준비를 위해, 유년과 청춘의 벼랑에서 낙하한다. 그러나 낙화암에서 떨어진다고 모두가 꽃은 아니며, 학교에 다닌다고 다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입시생으로 혹은 취업 준비생으로 이제 학생들은,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노력보다는 삶을 그저 살아내기 위한 노력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자체가 삶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된다. 즉 삶을 현재와 동떨어져 전개되는 무엇으로 보도록 길들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탄 급행열차의 종착지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공부란 무엇인가_김영민 (10~11p)


개그맨 박명수는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말했었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고. 단편적이긴 하지만 정말 무섭게 다가왔던 말이다. 책에서 얘기하는 상급 학교 진학에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혹독한 사회적 대가와 일맥상통한다. 삶의 노역을 안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나의 이유도 그 우려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공부 많이 해서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요즘 시대에 오히려 살아남기 급급한 삶으로 아이를 몰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삶이 그저 살아남기 위함이었던 것은 우리 부모님 세대, 나의 세대까지면 족하고 남는다.


마흔 즈음에서야 내 삶에 대한 나만의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아이들은 훨씬 더 일찍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알아가길 바라마지 않는다. 어린 시절, 커가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고 배워야만 하는 것들을 찾아 학교나 학원과는 다른 내용의 삶 공부를 이끌어주고 싶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방향이 흔들릴 때 잡아주고 싶다. 견디라고만 하는 벽 같은 부모가 아니라 언제든 쉬러 오는 나무 같은 부모이고 싶다. 좋을 수 만 없는 인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이겨나가는 사람으로 키워주고 싶다. 하루아침에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행동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생각을, 태도를 달리하다 보면 나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공부도 알아서 잘하게 되지 않을까....? 크흡... 아직 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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