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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Mar 04. 2021

Oldies but Goodies?!

과연 딸아이는 이번에도 부회장이 될 수 있을까?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상기된 딸이 나를 맞아준다.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옆에 와서는 내일 반 회장, 부회장 선거가 있어서 후보로 나가려고 준비했는데 한번 봐달라고 부산을 떤다. 작년에도 나가더니 올해도?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아이방으로 따라갔고 나는 곧 배꼽이 탈출되었다.


"사랑하는~~ 4학년~ 1반~ 학새~앵 여러 부~~ 운~~. 제~가아~~~ 부회장이~~ 된다며~~ 언~~~"


이건. 옛날 만화 '검정고무신'에나 나올 법한 운동장 애국조회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버전의 후보 공약되시겠다. 옛날 개그콘서트 옥동자가 [사랑하는 사랑하는 국민 국민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하던 콩트를 상상하면 된다. 뜬금없이 들어온 개그버전 후보 공약 - 꼬맹이의 야심 찬 공약과 교장선생님 성대모사의 콜라보는 엄마인 내 웃음보를 저격했고 오랜만에 웃다 눈물까지 흘렸다. (스트레스 확 풀림)


< 후보 공약 전문 -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의 리듬 필수 >

사랑하는 4학년 1반 학생 여러분(여러분 여러분 2번 반복)
저는 이번에 부회장 후보로 나온 ooo입니다(입니다입니다 2번 반복)

제가 부회장이 된다면 우리 반을 화목하고 즐거운 반으로 만들 것입니다.

보통 후보에 나오면 다들 하는 말이라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겠지만 겠지만 2번 반복) 
저는 정말로 회장을 도와서 우리 반을 즐겁고 화목한 반으로 만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입니다 입니다 2번 반복)


배를 움켜쥐고 재밌다며 웃었지만 사실 이건 딸내미가 이미 3학년 학급 부회장 선거 때 신박하게 써먹고 성공했던 레퍼토리였다. 작년에는 별생각 없다가 당일에 후보로 추천받게 되어 즉석에서 생각해낸 방식이었는데, 예쁘고 반듯하게 공약하는 후보들 사이에서 갑자기 할아버지 교장선생님 흉내를 냈던 딸은 그저 신선한 재미를 선사하여 부회장이 됐었더랬다. 문득 그걸 아는 아이들이 3학년 때 썼던 스타일 그대로 쓴다고 놀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딸에게 말했다. 예전에 했던 거랑 너무 똑같은데... 그때 꺼 그대로 쓴다고 애들이 식상해하지 않을까? 


"아니? 상관없어. 이게 내 개인기인데 또 하면 어때? 그리고 3학년 때랑은 멘트가 달라. 그때는 '제가 부회장이 된다면'으로 바로 시작했었지만 이번에는 앞에 자기소개가 있어.' (풉...ㅋㅋ)


스스로 당당하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런데 또 하나 궁금했다. 회장과 부회장 선거인데 이번에도 왜 부회장 후보야? 


"회장은 선생님이 심부름 많이 시킬 것 같아서 부담돼. 그냥 회장 옆에서 도와주고 싶어."


이건 날 닮았군.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되지만 뭐 하나는 하고 싶은 욕구. 나도 어렸을 때 그랬다. 나서고는 싶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앞에 '부'가 붙는 직책을 종종 맡곤 했었다. 개그코드는 아빠 피다. 여하튼 어리지만 나름의 생각과 이유가 명확해서 좋았다. 


연습 많이 해보는 게 좋으니까 할머니께도 가서 한번 보여드리라고 했다. 부리나케 할머니께 가서 설명드리고 "사랑하는 4학년 1반 학생 여러 부운~~" 하는데, 예상외로 몇 마디 못하고 커트당하고 말았다. 손녀가 뭔가 나서서 한다고 하는데 어머님 보시기엔 너무 임팩트가 없어 보였는지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oo아, 이름으로 삼행시 지어봐!" 하시더니 한참 신난 아이의 이름으로 갑자기 삼행시를 시전 하셨다. 이게 훨씬 낫겠다면서 말이다. 그냥 잘한다 훌륭하다 해 주실 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빠한테 가서 한번 더 연습하라며 아이가 시무룩해질 틈을 겨우 막았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부회장 안되면 어떡하지? 하니까 그 또한 상관없다고 한다. 

나의 꼬맹이를 보며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이 떠올랐다. 

딸이 이번에도 부회장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결과이든 딸도 나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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