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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Feb 11. 2022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취향감정

책을 많이 산다.


많다는 것의 기준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최소한 읽는 책보다는 사는 책이 더 많다. 그럴 땐 이런 말을 위안 삼기도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다."


멋진 말 아닌가. 책 욕심 많은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안이 되는 말은 없을 테다.


a. 내가 사둔 책만 다 읽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박식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b. 내가 사둔 책을 안 샀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부유하고 여유로운 상황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억지로 꽂아두고, 책상 한쪽에 가득 쌓아둔 지금의 나는 a와 b 사이의 그 어딘가에 놓인 셈이다. a도 b도 되지 못했지만, a와 b 모두가 되고 싶은 상태로 말이다.


그렇다고 산 책을 아예 읽지 않는 건 아니다. 적어도 모든 책을 앞뒤로 살피고, 첫 몇 문단만큼은 읽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만큼은 읽어야 '사야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산 책의 목록을 대충 추려보자면 이렇다.


로렌 아이슬리 『시간의 창공』

최승자 『어느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W.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에릭 재거 『라스트 듀얼』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톰 골드 『달과 경찰』

루스 해리슨 『동물 기계』


일도 해야 하는데 독서 속도도 느린 편이라 저 책을 단기간에 다 읽는다는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어느 하나 사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필연적인 책들이다.


『달과 경찰』은 아주 짧은 그래픽노블이라 끝까지 읽었다.


『토성의 고리』, 『장미의 이름은 장미』, 『어느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프랑스식 전쟁술』은 짧게는 수십 페이지, 길게는 수백 페이지 가량 읽었지만,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사이 예전에 사두었다가 다 읽지 못한 책을 또 두 권이나 펼쳐들었다.


전에는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얼른 다른 책도 읽고 싶고, 그래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어찌저찌 다 읽고 다음 책을 펼치면, 이전에 제대로 읽지 못한 책이 떠올라 또 제대로 읽지 못하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읽고 싶은 책을 마구 쌓아두고 아무렇게나 읽는다. 매기 오파렐의 『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과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두 권의 소설을 같이 읽고 있다. (예전에 사두었다가 최근에 펼쳤다는 바로 그 책 두 권이다)


1960년대 사이에 해안의 습지에 사는 소녀에게 벌어지는 일과 1976년 영국의 지독한 가뭄 가운데 어느 가족이 겪는 일을 다룬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가 묘한 화음을 이루는 걸 느끼게 된다. 마치 두 소설이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둘 중 어느 한 권을 오롯이 읽은 독자의 감상은 내 것이 아니지만, 이 두 권을 함께 읽은 감상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만의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더라도, 독자가 독자적인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가장 중요한 의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항상 이렇게 멋지게 공명하는 책들을 연결해 읽게 되는 건 아니다. 지독한 불협화음을 내는 책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어떤 책과도 잘 어울리는 멋들어진 배경음 같은 책도 있다. 가령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은 웬만한 소설과 어떻게든 연결되고야 마는 마법 같은 책이다.


물론 『한낮의 우울』도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워낙 두꺼운 책이니까.


언젠가 읽게 되겠지.


전에는 이런 생각이 마음의 빚이었다 : 언젠가 읽어야만 해!


이제는 이런 생각이 오히려 즐거움을 준다 : 언젠가 읽게 될 때까지 이 이야기는 어디도 가지 않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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