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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Mar 02. 2022

첫 소설

소설을 쓰자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보다.


그 무렵 내가 제일 좋아하던 책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


지금에 와서야 '셜록 홈즈'하면 베네딕트 컴버배치(a.k.a. 오이형)가 아닌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의 셜록 홈즈는 시드니 파젯이 그린 삽화의 이미지가 절대적이었다. 깡마른 몸, 매부리코, 파이프 담배, 신경질적인 눈매, 움푹 파인 볼.


셜록 홈즈를 읽던 어느날, 나는 갑자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 이름은 '칸'이었는데, 독일 축구선수 올리버 칸의 성을 따온 것이었다. '칸'은 물론 명탐정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약간 냉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허영심 넘치는, 젊은 버전의 어설픈 셜록 홈즈였다고나 할까.


첫 소설은 독일계 미국인 탐정 칸이 사라진 중국의 옥새를 찾는 이야기였다. 살인사건이 있었고, 존 왓슨에 해당하는 조력자 친구도 만나게 된다. 이런저런 우연과 설명되지 않는 직관으로 사건이 해결되어버리기는 해도, 어찌나 즐거웠는지 앉은 자리에서 소설의 결말까지 내달렸다.


그런 경험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정말로.


이 시리즈는 (독자 없이도)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급기야는 아르센 뤼팽을 패러디한 스페인 출신 괴도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이야기를 펼쳤더랬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이 괴도가 의도치 않게 휘말린 살인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괴도는 용의자로 몰린 와중에 명탐정보다도 먼저 사건의 진상에 도달해버리게 되는데, (작가인 나도 모르는 이유로) 자신이 아닌 명탐정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해나가는 과정을 다뤘다.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괴도가 지목한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다는 반전도 마련되어 있었다.


또 하나, 기나긴 여정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진 사건을 파리에서 이르러서야 해결한다는, 굉장한 포부의 사건이었다.


무엇 하나 현실적인 게 없고, 어설프기가 짝이 없었지만, 아직도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내게는 강력한 순간이었다.


(나중에는 더 야심이 넘쳐서 단군 이전에 조선 중기 정도 수준의 문명을 일군 국가가 있었다는 설정의, 판타지 역사 소설도 꽤 오래 썼다)




지금도 소설을 쓸 때면 즐겁기는 하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는 그렇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도, 첫 소설을 쓸 때만큼의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마 그날보다 즐겁게 소설을 쓸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왠지 그러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개 즐거움이라는 건 첫 경험의 순간에 가장 크고, 점점 경험할 수 있는 '첫 순간'은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핵심은 가장 큰 즐거움을 갈구하기보다 지속가능한 즐거움을 확실히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나마 유행했던던 '소확행'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소설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이나,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줄 때의 만족감 같은 건 그다지 크지 않다. 그냥 글을 쓰는 일 자체가 즐거울 따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초에 첫 소설은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다.


내 즐거움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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