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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Feb 23. 2022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골랐는데?

소설을 쓰자

한국소설의 독자가 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 이전에는 주로 영미,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다 공모전에 단편소설을 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이 기회라는 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지만, 최소한 단편소설을 써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간 허락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가 한국 작가의 소설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단편소설이라면 아주 문외한이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고는 해도, 최소한 '단편소설'이 뭔지는 알아야 단편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내보기라도 할 게 아닌가?


그래서 일단 서점으로 갔다.


한국소설을 모아둔 서가를 서성거렸다. 단편소설집으로 보이는 책을 위주로 살폈다. 아는 작가도 없고, 책을 추천해준 사람도 없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책을 골라야 좋은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막간 tip : 단편소설을 거의 접해본 적 없는 지인이 추천을 부탁할 때, 나는 가능하면 최근의 수상작품집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그중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는다면,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는 식으로 독서 목록을 늘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은희경, 김연수, 김영하, 편혜영, 황정은 작가의 단편집 가운데 아무거나 골라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들어 첫 소설의 첫 문장을 읽었다.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이 문장을 읽은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토록 멋진 첫 문장은 여간해서는 만나기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읽지 않을 수 없겠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고른 나의 첫 단편소설집은 박민규 작가의 첫 작품집인 『카스테라』다.


첫 책을 골라든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두 번째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책이 실패해하더라도, 첫 번째 책은 잘 골랐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을 고를 때는 첫 문장까지 읽을 필요도 없었다. 제목만 보고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책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정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지?' 하는 의문으로 구매를 결정했다. (아쉽게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데, 그렇다는 점이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책을 계기로 김영하 작가는 내가 사랑한 첫 한국 작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친구들은 내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간도 아니었고,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고른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선구안이었다.


(또 하나 재밌는 우연은 김영하 작가가 『카스테라』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두 작가의 다른 책까지 찾아 밤새 읽었던 그날들이 지금 나의 글쓰기의 토대가 되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긴 저 두 작가를 거치지 않고서 소설을 쓸 수 있던 습작생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그때 다른 책을 골랐다면 지금 뭔가 다른 걸 쓰고 있었을지 종종 궁금해진다. 이 글을 쓰다 책장에서 그 두 권의 책을 꺼내 조금 살펴보았는데, 어쩌면 그때 다른 책을 골랐더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두 권이 첫 책이 아니었더라도, 언제라도 결국 이 책들에 매료되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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