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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Feb 19. 2022

세상의 역사에는 죄보다 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감상기 : 코맥 매카시 『로드』

섬뜩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짧지만, 여운이 긴 소설이기도 하다.


건조하고 냉소적인데(코맥 매카시의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다정하고 사려 깊다(코맥 매카시의 소설에 있어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세계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마 핵전쟁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알 수 없다) 대부분은 죽었고, 일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살육과 식인까지 서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끔찍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다. 남자와 아들. 이름도 거론되지 않은 채로(혹은 이름 따위 필요하지도 않은 채로) 두 사람은 걷는다.


마냥 걷는다. 남쪽의 해안으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무언가는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이 글에서 밑줄 친 문장은 모두 책에서 직접 인용한 문장임을 미리 밝힙니다)


When he woke in the woods in the dark and the cold of the night he'd reach out to touch the child sleeping beside him.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남자가 일어났을 때, 그가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그의 곁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는 것'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 그가 어둡고 차가운 밤의 숲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흔히 마지막 대목이 가장 많이 회자되는 소설이지만, 내게는 이 첫 문장이 가장 감동적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곁에 있는 아이에게 닿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어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럴 것이다.


번역의 경우 이러한 주제적인 측면을 살리기보다는, 문장 자체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밤의 한기를 느끼자 손을 뻗어 옆에서 자는 아이를 더듬었다"고 나누어 썼다. 간결하고 건조한 느낌의 문체를 멋지게 살린 번역이다. 다만 위에 언급한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원문을 참조해야 한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뿐이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남자의 세계에 대한 인식, 아이에 대한 마음, 두 사람의 관계를 명쾌히 보여준다. 별 것 아닌 문장이지만, 그러므로 가장 잘 쓰여진 문장들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남자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수화기를 집어 들더니 오래전 아버지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소년이 남자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뭐하세요?


소년은 전화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이미 소년의 기억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 세계가 황폐해져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남자는, 분명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소년이 이 남자를 그리워하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고장 난 전화기를 붙잡는 장면은 영화나 소설에서 익숙한 것이지만, 이 장면만큼 큰 울림을 남긴 장면은 없었다.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 재가 되었기 때문에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눈송이는 마지막 기독교도 군대처럼 소멸했다.


이 세계의 최후를 짐작케 하는 문장들. 모든 것은 불타버렸고, 아마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설명하지 않고도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문장이야말로 작가의 솜씨가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이들이 무슨 짓을 했을까? 세상의 역사에는 죄보다 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거기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


정말이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내가 읽어본 가장 아름다운 문장.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세계, 모든 이들이 세계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세계. 더구나 이 소년에게 이 세계가 내린 벌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다. 그러니 남자가 보기에 응당 이 세계에는 죄보다 벌이 많은 것이리라.


그런데 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을까? 역설적으로, 이 모든 일이 인간이 저지른 죄 때문에 받는 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러니까, 이 끔찍한 비전의 세계에 비해 인간은 조금은 더 선한지도 모른다는 어떤 믿음. 그것이 이 남자에게는 위안이 된다.


흉포한 폭력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선함을 믿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아닐까.


저 사람들이 널 발견하면 그래야 돼. 알았지? 쉬. 울면 안 돼. 내 말 들려? 어떻게 하는지 알지. 그걸 입 안에 넣고 위를 겨냥해. 빨리 세게 해야 돼. 알았지? 울지 말라니까. 알아들었지?


위로가 있다면, 이런 절망도 있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남자의 심정, 아마도 처음 이런 말을 듣는 게 아닐 소년의 심정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짐작하기도 어려운 것인데, 작가는 별다른 격앙 없이 무덤덤하게 이런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할 이야기가 없어요.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제 이야기는 이미 다 아시잖아요. 옆에서 봤으니까.

네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꿈 같은 거요?

꿈 같은 거. 아니면 그냥 네가 생각하는 거.

네. 하지만 이야기는 행복해야 하잖아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아빠는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해주시잖아요.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

우리가 사는 거하고 비슷해요.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안 그렇고.

네. 아빠 이야기는 안 그래요.


남자는 소년에게 행복한 이야기만을 들려주려 애썼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년은 '자신에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될 뿐이었다. 남자의 노력과 소년의 침묵. 어쩌면 이 부근이 이 소설의 감정적 클라이맥스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럼에도 남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는 것. 두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가 없소.


그래, 그렇다. 신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오니까.

아직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곁에 신이 머물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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