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름 Feb 16. 2022

나도 동네 친구가 있었으면

취향감정

내 꿈은 겨울이 끝나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다. 영영 여름이 오지 않는 나라에서.


한때는 여행하는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북유럽에서 오로라를 보고, 동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거닐고, 북아메리카의 광활한 산맥이나 북아프리카의 사막 따위를 보며 살고 싶었다. (바다를 무서워해서 섬에 대한 환상은 거의 없는 편이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예전만큼 강한 갈망은 아니다. '어디에 있는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가 내게 더 중요한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밤의 공원이든, 낮의 카페이든, 새벽의 자취방이든 말이다.


초, 중, 고 시절에 친구란 매일 만나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그 대다수는 물론 동네 친구였다. 그러니 길을 걷다가도 수시로 마주치고, 보고 싶을 때면 아무 때나 연락해 10분이면 만날 수 있고, 밤늦도록 놀이터 그네에 앉아 떠들어도 귀가하는 데에 부담이 전혀 없었다. 방학이 되면 고작 몇 주 못 만나는 일이 엄청난 사건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방학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지기도 하니까 실제로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겠지)


대학 때의 친구는 매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생활권에서 지냈다. 자취하는 친구도 적지 않아서 밤새 웃고 우는 게 그리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사를 다니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지금 사는 동네에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는 없다. 그렇다고 불편하지는 않다. 다들 핸드폰이 있으니까 언제든 연결된 듯이 연락할 수 있다. 오히려 물리적으로는 얼마간 거리가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가까이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동네 친구가. 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만날 수 있고, 가볍게 맥주 한 잔 하고 금세 헤어져도 언제든 또 볼 수 있으니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있는 사이.


어떤 감정, 어떤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짧아서 당장 누군가라도 붙잡고 떠들지 않으면 휘발되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사라진 감정과 이야기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응어리를 남기고 만다.




내겐 멀리 살더라도 가끔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고,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함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 그건 정말이지 운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날 때, 그것도 며칠이나 길게는 몇 주 전부터 약속을 정해두었을 때, 나는 기대로 마음이 부푸는 걸 느낀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라도 된 듯이. 그 힘으로 새벽의 무력감과 오후의 피로감을 견디는 날도 적지 않다.


맞아, 나 이 친구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모처럼 만나 두서없이 떠들고, 밀린 근황을 주고받고, 한참이나 술을 마시다 보면 술이 조금 아쉽고,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여전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고, 어떤 것은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여전히 그 친구가 궁금하다는 걸 의식하게 된다.


최근 <해리 포터> 시리즈 관련 다큐멘터리 필름인 <해리 포터 : 리턴 투 호그와트>를 보았는데, 론 위즐리를 연기한 루퍼트 그린트가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를 연기한 엠마 왓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

친구로서"


농담처럼 '친구로서'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웃는 듯 눈물을 흘린다. 어쩐지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20년이나 이어진 우정. 가장 철없던, 가장 혼란스럽던, 가장 영광스럽던, 가장 괴롭던 시절을 함께 통과하면서, 흉터이거나 문신처럼 마음에 새긴 동지애 같은 것. 아니, 그것이야말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친구가 누구에게나 흔하게 한두 명쯤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러나 적어도 그 중 몇 가지 순간을 함께 겪고, 통과하고, 마음을 나눈 친구라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시 쓸 수 있겠지. 그 친구들에 대한 마음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면 또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럴 때를 위해서 우정이라는 말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실은 사랑이라는 말에 굳이 인색할 필요가 있나 싶다. (막상 친구 앞에서라면 민망함에 절대 입에 담지 못할 테지만!)


어느덧 오랜만의 만남이 끝나갈 즈음


또 만나자는 말이, 언제든 놀러 오라는 초대가, 다음번엔 내가 놀러 가겠다는 약속이, 설령 기약이 없을지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떠올리게 된다.


다시 어린왕자를 기다리듯이.


그럼 뭐, 동네 친구 없어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 또 약속을 만들어 만나러 가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기약 없는 기대가 또 다음 며칠, 몇 주, 어쩌면 짧은 계절을 견디게 해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0년을 되돌아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