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의 그림과 <오리건의 여행>을 함께 만나며
16년 퇴직 당시 사내 복지 포인트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제휴 사이트들 중 온라인 서점들이 있어서 책을 제법 샀다. 특히 평소라면 살 수 없는 타센(Taschen) 출판사의 화집들을 여럿 구입했다. 몇몇은 오자마자 뜯어 보았지만, 또 몇몇은 비닐도 뜯지 않은 채 책장에 꽂아두었다. 갑작스레 책을 여러 권 들이면 꼭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제부터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있었다.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 심지어 아무 것도 안 먹었다. 애들을 재우고 나니 그제서야 허기가 밀려왔다. 빵 한 조각을 먹고, 내 그림책과 화집을 꽂아놓은 작은 책장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 작게 소리내면서 책들의 포장을 하나하나 벗겼다.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을 주르륵 넘겨 보았다. 눈에 익은 그림들이 제법 보였다. 그러다 이 그림과 마주했다.
1963년 작 <People in the Sun>.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호퍼의 그림 중 흔히 인용되는 그림은 아닌 듯 하다.(내가 못 본 것 뿐일까? ㅎㅎ) 잘 차려입은 호텔 투숙객들이 테라스 의자에 나란히 앉아 햇살을 쪼이고 있다. 뒤쪽에 앉은 남자 한 명만이 고개를 떨군 채 책 속에 빠져 있고, 다른 사람들은 무심히 앞쪽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다. 작은 길 하나 사이로, 노란색으로 넘실대는 밀밭과 광대한 산맥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앞줄에 앉은 이들의 시선은 이 풍경을 향하고 있으되, 그 누구도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게다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라면 누군가 한 명 쯤은 건너가 보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보는 듯 무감한 사람들의 얼굴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침 햇살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지도, 혹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조각상처럼 의자에 앉아 무기력한 대각선을 만들어낸다. 대각선이란 본디 활성 에너지가 높은 선이다. 그런데 이다지도 무기력한 대각선이라니? 대체 이들의 마음은 어디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밀밭 풍경만 보면 나는 자연스레 <오리건의 여행>으로 돌아온다. 코 앞의 밀밭을 무감히 바라보고만 있는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과 달리, 오리건과 듀크는 밀밭에 직접 들어가 길을 낸다. 걸어온 자욱이 밀밭 위로 선명하게 나 있고, 듀크와 오리건의 시선 역시 분명하다. 그들은 오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오래 길을 걸어야 한다. 돌아갈 곳을 분명히 직시하는 이들의 곧은 시선과 단단한 발걸음. 듀크와 오리건이 만들어낸 수직선은 너른 수평선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지만, 고요한 화면에 커다란 에너지를 더한다.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출렁이는 두 친구의 마음이 전해온다. 밀밭의 촉감,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황금빛 색깔 그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건과 듀크. 내 마음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출렁였으면. 자꾸만 다른 곳으로 어지러이 생각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