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입구에서 읽는 시

그 어떤 봄이라도 나는 또다시 박준을 집어들겠지만.

by 안개향

2020년 3월, 꽃들은 기어코 터져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기미가 없던 매화가 하루 사이 활짝 꽃잎을 피워 올렸다. 산수유는 아직 한창, 안 보이던 꽃마리와 냉이꽃과 민들레도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명백한 봄이었다. 코로나로 개학도 미뤄진 초유의 사태였지만,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라도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봄이었다.


놀이터 한 구석에 앉아 박준 시인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읽었다. 함께 시 읽는 엄마들과의 모임 호시탐탐에서 3월의 시집으로 선정한 책이었다. 둘째는 놀다 말고 자꾸만 노란 산수유 가지를 내게 건넸다. 어디서 이렇게 봄을 잘도 주워오나. 눈과 손이 있다고 다 보고 주울 줄 아는 건 아니다. 들끓는 마음을 삭이며 시를 읽어내려 애쓰던 내 마음보다는, 작은 꽃가지를 선물할 줄 아는 둘째의 마음이 시에 더 가까웠으리라. 노란 표지 위로 노란 꽃을 계속 얹어주려니, 자꾸만 표지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가 얹어준 노란 꽃 마음


실은, 시 한 편이 아려서 자꾸만 표지를 덮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는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박준, "그해 봄에"


그해 봄에는 손목을 그을 일은 아니지만, 마음만으로 되지 않고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코로나가 무섭게 확산되면서 겨울이 끝모르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처음 겪는 터널에 허덕이는 와중 남편과 크게 싸웠다. 날카롭게 벼려진 말에 베인 남편은 독화살을 맞은 듯 앓았다. 상처를 준 미안함, 마음공부 한답시고 설쳐도 나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 자기도 다 맞는 건 아니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분노, 내 생일날인데 적당히 풀고 넘어가주지 하는 원망, 그런 원망조차도 다 잘못이라는 자책....... 다 내 마음 같지 않게 덜 마른 빨래처럼 구겨져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쿰쿰한 쉰내가 가시질 않았다.


박준은 그렇게 내게 왔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는 계절에. 손목을 그었다는데 피 내음은 하나도 나지 않는 순하고도 독한 봄으로.


어떤 시집은 계절로 기억된다. 나에게 봄은 박준이다. 여름은 안희연이고, 가을은 허수경이며 겨울은 백석이다. 그들에게 그 계절의 시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름이 되면 또렷하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흰 토끼를 떠올리고, 가을에는 <호두>를 깨물고 싶어졌다. 겨울에는 <흰 바람벽이 있어>에 비친 쓸쓸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봄에는 박준을 읽는다. 아니, 겨울의 끝에서 봄을 부르고 싶은 마음으로 박준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햇빛의 밀도는 조금씩 달라지는 그런 봄을 위해.


그러니 2021년 다시 찾아온 봄의 첫날에도 박준을 펼쳐든 건 우연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또 며칠 전 남편과 싸운 직후였다. 무슨 데자뷰인가. 봄이 가까워져 일렁이는 마음과, 크게 다투고 울렁대는 마음이 이 담백한 시집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 다가온 시는 “그해 봄에”가 아닌 “삼월의 나무”였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엇으면 한다.
- 박준, <그해 봄에>

싸움의 발단은 달랐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부부싸움의 모양이라는 게 집마다 다르긴 해도, 그 집 안에서만큼은 생각보다 비슷하다. 쓸모가 없어져서 스쿨 통장을 없앴다는 남편의 말에 매년 쓰는 거라고 대꾸하니, "은행 가서 다시 만들면 되잖아."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속에서 갑자기 불이 올랐다. 애 둘이 코로나로 집에 있는 상황에서 은행 볼일 보러가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아는 걸까? “오빠는 애들 교육에 관심이나 있어?”라며 불쑥 상대를 공격하고 만다.


그렇다고 남편은 그냥 넘어가주는 사람이 아니다.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야 마는 그가 나는 야속했다. 그냥 “신경 못 써서 미안해, 뭐 좀 도와줄까?” 하고 넉넉하게 품어주기를 바랐다. 나는 언제나 그런 말이 고팠으나, 구할 곳이 없었다. 그는 나를 비난한 적이 없는데 왜 나는 그를 비난하느냐며 화를 냈다. 우리의 싸움이 이런 패턴이라는 걸, 결혼한 지 11년이 걸려서야 겨우 알았다.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도닥여 달라고 말하는 게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도 그런 말들은 잘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일들은 상대에게 얘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으니 늘 견디는 형국이다. 그런데 상대가 무심히 던진 말이 나의 안 보이는 노력들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반작용으로 상대를 매섭게 몰아붙이게 된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너는 뭐 그렇게 잘 해? 너는 이런 것도 안 하잖아?


품어주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리고 꼭 그만큼 내가 미웠다. 비난으로 가득 찬 내 말을 버리고 싶었다. 연하고 수수한 삼월의 나무에게 보내는 살가운 마음과 따듯한 기운. 그런 말을 새롭게 배우고 싶었다. 나와 동갑내기인 시인은 어떻게 이런 언어를 갖게 되었을까. 안경을 쓴 동그랗고 단정한 얼굴이 시 속에 그대로 있었다.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여서, 어쩐지 늙어버린 나의 얼굴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에서 치밀어오르는 마르고 뾰족한 말들에 더 많이 찔린 건 아마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을 테니까.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첫 시집으로 50쇄 이상을 찍은 그 역시 원망의 말들을 가득 담고 살던 시기가 있었단다. 시의 신이 온 것럼 시작을 하던 시절, 신춘문예에 번번이 낙방하며 세상을 원망했다고 한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아닌지, 예술을 감히 누가 판단한다는 것인지, 이렇게 시가 좋은데 왜 나를 써주지 않는지. 봄 같은 시 뒤에도 겨울은 늘 있었구나. 하긴 겨울을 겪지 않았다면 봄이 봄인지 모르고 지나갔겠지. 봄을 간절하게 아는 건, 겨울을 혹독하게 겪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2021년 2월의 마지막 주, 그와 같은 온라인 행사의 강연자로 간 적이 있었다. 날짜와 시간대가 달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박준 시인을 좋아한다 했더니 행사 담당자가 사인을 받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화면 넘어 보는 시인은 시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딘지 수줍은 듯 하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 이야기가 넘쳐서 기어코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어하는 사람. 다정을 꼭꼭 씹어먹은 저녁이었다.


깊숙히 담긴 말들을 흘려보내고 닮고 싶은 말들을 채우고 싶어 시를 읽는다. 말에 걸리고 말에 속고 말에 베이는 날들 속에서, 보드랍게 살결을 씻어주고 어루만져줄 말들을 뜰채로 건져 내기 위하여. 봄의 입구에 건져 올린 시어들을 늘어놓고 말린다. 아직은 햇볕이 약해 제법 시간이 걸린다. 아침마다 매번 겨울 패딩 대신 봄 외투를 입었다가 부르르 온 몸을 떨만큼, 삼월의 아침은 매번 나를 속인다.


그래도 햇살은 힘이 세다. 올해도 꽃들은 봄햇살을 잊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백목련 겨울눈은 벌써 제일 두꺼운 털옷을 벗어젖혔다. 연한 연둣빛이 감도는 뽀얀 꽃봉오리가 빼꼼 얼굴을 내민다. 알에서 깨어나는 아기새 같아 마냥 기특하다. 작은 꽃마리와 봄까치꽃은 잔디밭에 푸른 별자리를 만들어둔지 오래다. 민들레와 제비꽃도 드문드문 반짝이는 얼굴을 내보인다.

봄이다. 아직은 햇살에 속아도, 봄은 봄이다.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택배 하나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세상에, 행사 담당자가 보내준 박준이었다. 시인의 사인이 담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권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 박준 시인 사인


박준 시인의 사인


아아. 또다시 햇빛에 속아도 좋으니, 부디 매해 봄마다 박준을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 마음 같지 않은 일들에 허덕이거나, 연하고 수수하고 살갑고 따듯한 말이 부족해 낯부끄러워지는 일은 좀 적었으면 좋겠다. 이번 봄만큼은 얼굴에 칼바람보다 햇빛이 먼저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사실 그 어떤 봄이라도 나는 또다시 박준을 집어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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