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펜을 쥐어요, 엄마

엄마의 겨울과 딸의 겨울

by 안개향

내가 지금의 큰애 나이 때쯤, 우리 집 베란다에는 키 큰 이젤과 캔버스가 있었다. 계란말이나 연근 볶음 같은 엄마 반찬 냄새 사이로 희미한 유화 기름 냄새가 섞여 났다. 선생님을 따라 야외 데생을 나가던 엄마의 캔버스에는 초록이 가득했다. 아기 손처럼 보드라운 연두, 제법 여물었다고 으쓱거리는 풀빛, 물 옆에 사는 봄날의 쑥빛, 그늘로 스며든 어두운 숲빛....... 가까이서 보면 이끼 덩어리처럼 얽혀 있고 뒤로 물러나보면 봄의 들판이나 냇가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림을 좋아했다. 그리는 일도 보는 일도 좋아했다. 집에는 수채화, 유화 물감에 색연필과 이젤과 캔버스까지 다양한 미술 도구가 있었다. 시금치값 감자값까지 알뜰하게 가계부 쓰며 돈 아껴 쓰던 엄마가 유일하게 자신에게 사치를 부리던 물건이 좋은 물감과 붓이었다. 밥 해주는 엄마, 공부 가르치는 엄마, 청소하고 빨래하는 엄마 중 그림 그리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엄마에서 상순씨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엄마는 모르긴 몰라도, 매일 아침 일기장을 펴는 지금의 내 얼굴과 꽤 닮아 있었을 거다.


엄마는 매번 '나는 못 그리면서 잘 그리고만 싶어 해서 힘들어'라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림 그리는 모습 자체가 그냥 좋았다. 배우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가는 모습이 멋졌다. 그 시절 다 쓰지 못하고 남아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내어주는 새 물감이나 붓을 보면 마음이 찌릿해진다. 애들이 저렇게 치덕치덕 뭉개면서 아무렇게나 쓸 물건이 아닌데, 엄마가 계속 써야 하는 물건인데.


엄마 덕에 어릴 때 미술관에 종종 갔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용인 호암미술관에 제일 자주 다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자마자 천장까지 번쩍거리며 솟아 있던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이나,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진짜 같던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엄마 곁에 서서 그림을 보다 지루해지면, 달팽이 껍질처럼 생긴 오르막길을 타박타박 오르내렸다. 작은 아이의 걸음걸이 소리가 미술관 공간을 채우며 크게 울려 퍼지면, 나도 덩달아 커지는 기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림을 좋아하게 된 건 1993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샤갈-사랑과 향수의 세계’전에 엄마와 다녀온 후부터였다. 커다란 화폭 위를 가득 채운 깊고 아득한 푸른색 앞에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물감 가득히 공기를 포함하고 있어 투명한, 물보다는 하늘에 더욱 가까운 푸른 빛. 구름처럼 떠다니는 사람들과 음표 같은 물감들. 그 속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어떤 사물도 날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았다.


2007년 쓴 일기를 보면 그때 몇 장의 엽서를 사왔던 모양이다. 종종 들여다보기도 했나 본데, 어디로 흩어졌는지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 엽서를 사왔다는 기억조차도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 회사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유년의 기억이 흩어졌을지 짐작도 잘 안 된다. 그래도 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듣고 인사동 평창동 삼청동을 쏘다니며 전시회를 찾아다닌 건 다, 11살에 만난 샤갈 때문이었다.


그러니 2009년 결혼하기 바로 한 해 전, 엄마와 둘이 프랑스 여행을 가기로 했을 때 니스의 마르크 샤갈 미술관을 행선지에 포함시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들른 파리에서도 미술과 관련된 여행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셰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은 물론 모네의 지베르니와 고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도 다녀왔다. 우리는 꽤 쿵짝이 잘 맞는 그림 친구였다. 곁에서 같이 보다가 멀찍이 떨어져서 각자 보다가, 다시 만나 속닥거리며 서로의 시간 속을 오갔다.


여행 내내 엄마는 작은 노트에 볼펜으로 성당이나 건물들을 조그맣게 그렸다. 지렁이 같은 글씨로 글만 빼곡한 내 노트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자기 느낌대로 종이 위에 풍경을 옮겨내는 엄마의 그림 노트가 부러웠다. 구구절절한 100마디보다 명료한 1장의 이미지. 그건 엄마가 그림으로 붙든 파리의 시였다. 엄마는 그마저도 매번 못 그린다 투덜거렸지만.


마침내 도착한 마르크 샤갈 미술관은 연회색 건물과 초록빛 정원이 서로를 다정히 껴안고 있었다. 한층 누그러졌다 해도 아직은 강렬한 9월 남프랑스의 햇살이 미술관 전체를 품어주었다. 이 미술관은 인간의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이삭의 희생, 아가서 등 성서 내용을 주제로 한 샤갈의 작품만이 선별 전시된 곳이다. 유화 뿐 아니라 스테인드 글라스, 태피스트리, 모자이크 벽화 등 다양한 재료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11살의 내가 처음 반했던 공기 같은 푸른색보다는, 묵직하고 강렬한 붉은색과 녹색이 더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때때로 엄마에게 성경 내용을 설명하고 감상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샤갈의 곁을 오갔다. 내게 그림의 문을 열어준 엄마와 함께 이곳까지 날아와 함께 샤갈을 보고 있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의 지문 하나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니스에 위치한 샤갈 미술관




프랑스 여행 다음 해, 나는 결혼을 하고 회사를 다니고 아이를 낳았다. 미술관 가는 시간을 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린 아이들과 미술관에 가면 조용히 시키느라 에너지를 다 썼다. 어쩌다 혼자만의 시간이 나도, 미술관에 가게 되지 않았다.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 찾아보고 다녀오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정이 번잡하기만 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거나 조용히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할 뿐, 한번 좁아진 나의 세계는 다시 넓어질 줄을 몰랐다.


오랜만에 엄마와 미술관에 가게 된 건, 둘째가 3살이 되고 난 후였다. 프랑스에 다녀온지 꼭 8년만. 김수근 건축가의 옛 공간 사옥에 자리잡은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였다. 바바라 크루거, 신디 셔먼, 백남준, 키스 해링 등 미술관의 소장품도 훌륭하고, 작품과 전시 공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인상적이었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전시를 보고 난 후 별관 3층에서 엄마와 함께 한 점심 식사이다. 손녀들이나 남편 없이 딸과 단둘이 그림을 보고 식사를 하는 내내, 엄마는 봄볕처럼 웃었다. 샤갈 미술관의 정원 노천카페로 돌아가 앉은 양 우리는 들떠 있었다.


사실 그 해 엄마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수술을 받고 요양원에 들어가셨고, 외할아버지는 아직은 정정하다 해도 집에 혼자 계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요양원과 친정에 드나들며 두 분을 돌보느라, 엄마에게는 그림을 그릴만한 물리적인 시간도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다. 홍대 근처에서 열리는 펜 드로잉 수업을 신청해드렸지만, 엄마는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 해 어버이날 선물로 내가 고른 건 그림책 『엠마』였다. 일흔 두 살 생일이 지나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엠마 할머니. 사랑하는 풍경을 사랑하는 화폭 위로 옮길 줄 알게 된, 그래서 홀로 살아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할머니.


“맞아 인생은 길고 혼자 즐길 줄 알아야지. 사람은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야 하는데........”


엄마는 초저녁 눈썹달처럼 희미하게 말끝을 흐렸다. 웃고 있었지만 소금기가 분명 배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점점 자라고 나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제는 엄마와 가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을 때 코로나가 터졌다. 그리고 엄마가 다시 허리를 다쳤다.


은퇴 후 아빠는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잘 하고 싶어 늘 전전긍긍하던 엄마와 달리, 못 하니까 배우는 거 아니냐며 아빠는 느긋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글씨를 썼다. 시간을 이기는 건 없었다. 몇 년 사이 아빠의 글씨는 원숙해졌고, 단체전을 열었다. 이제는 서화도 배우고 싶다며 난을 친다.


엄마는 "너희 아빠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나는 그 뒤의 엄마의 얼굴을 안다. 질 좋은 종이에 찍힌 근사한 단체전의 도록을 보며, 까맣게 흘러내릴 것만 같던 엄마의 눈빛을. 아빠가 그토록 꾸준히 글씨를 쓰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엄마 덕분이었다. 엄마가 밥을 해줬고 빨래를 해줬고 양가 부모님 반찬을 해다드리고 돌봐드렸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아빠는 방통대를 다니고 중국 고전 시를 외우고 서예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전시회 앞에서 감개무량하면서도 동시에 슬펐다. 내겐 언제나, 전시회에 엄마의 그림이 더 먼저 걸릴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눈 아래의 작은 그늘을 들키기 싫어, 나는 엄마와 아빠를 지나 한참 앞에 걷거나, 반 보쯤 뒤에서 따라 걸었다.


엄마는 몇 년 사이 더 나이가 들었고, 등허리는 나을 줄을 모르고, 급기야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에도 때가 있는 걸까. 엄마가 붓을 쥘 수 없다면 함께 그림이라도 보러가고 싶었다. 그래서 예매해둔 샤갈 전을 이틀 앞두고, 아빠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혹시나 코로나일까 싶다며 혼자 가서 전시를 보고 오라고 했다. 같이 가고 싶던 전시인데 혼자 가니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돌봄 노동에서 벗어나 엄마와 딸, 두 사람이 전시회 하나 오붓하게 보러 가는 것도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2009년 프랑스에 갔던 사진을 꺼내어보면, 엄마는 젊었고 나는 어렸다. 50대의 엄마와 20대의 나는 씩씩하고 무엇보다도 건강했다. 2017년의 아라리오 뮤지엄 사진 속의 우리도 불과 4년 전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엄마가 처음 나를 샤갈에게 이끌어준 그 시절 엄마 나이와 꼭 같아졌다. 사진 속 내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다 보면, 엄마의 얼굴이 반쯤 묻어나온다. 내 얼굴은, 40년 전 당신이 그려준 그림 위에 내가 덧입히고 덧칠해온 그림 한 점이다. 곱든 흉하든, 그건 우리가 함께 그려온 그림이다.


파리 오르셰미술관 앞, 지베르니 모네 정원에서


당신의 얼굴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면 내 얼굴이 조금 묻어나올까. 나는 당신이 엠마 할머니처럼 다시 의자에 앉아 종이 위로 펜을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과 함께 미술관 회랑을 다시 나란히 걸어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에 서로를 계속 덧칠할 수 있기를....... 그림으로 향하는 길은 당신이 내게 물려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손가락이 아프다는 엄마에게 작은 그림이라도 그려보라고 말한다. 마흔 살의 엄마가 그토록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건 내가 그토록 애타게 글을 썼던 것과 같은 이유였을 테니까. 한 사람을 붓을, 한 사람을 펜을 들어 비슷한 겨울을 견뎠을 테니까. 60이 넘어 부모를 떠나보내고 몸이 아파 오래 잃어버렸지만, 이제 그만 그루터기에 앉아 작은 모닥불 하나라도 피워보라고 나는 기도한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저 엄마의 펜을 들어보라고. 나에게 빨간 볼펜 보리가 있듯, 엄마도 엄마의 보리를 맞이하라고.


올해의 어버이날 선물은 까만 붓펜과 손바닥 두개만한 드로잉북이다.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붓펜 뚜껑을 열고 마침내 종이 위에 선을 긋는 새로운 첫 날을. 어린 날 받았던 그림 사랑을, 이제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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