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남,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늦은 저녁까지 열기가 식지 않는 8월의 놀이터, 가장 많은 눈길을 받는 건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진분홍 꽃을 피운 배롱나무이다. 아이들은 나무 주변에서 힘껏 떠들고 뛰어놀다 가끔은 나무에 오르며 제 용감함을 뽐낸다.
8년 간 이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배롱나무 꽃이 시들 때쯤이면 곁에선 단풍나무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거다. 낙엽이 떨어지면 첫 눈발 속에서 새빨간 마가목 열매가 새들을 부르고, 매화나무에 다시 꽃망울이 맺힐 때까지 초록 잎들은 숨을 죽이고 있을 거다. 산수유, 벚나무, 이팝나무, 산딸나무가 차례로 제 꽃을 선보인 후에야 배롱나무의 차례가 돌아오겠지. 나무들의 시계는 정직하고 정확하다. 때를 놓치는 법을 모른다.
김선남 작가의 그림책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의 주인공은 도시 속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도 볼 수 있는 친숙한 나무들이다. 앞표지와 뒤표지를 한데 펼치면, 마종기 시인의 「마흔두 개의 초록」처럼 연하고 진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초록이 제 몸을 넓힌다. 우리가 쉽게 ‘나무’라고 뭉뚱그리던 세계가 ‘벚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계수나무’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무 아래 천천히 걷고 대화를 나누고 쉬어갈 줄 아는 이들에게만 열리는 세계이다. 보드랍고 서정적인 그림의 색감은 독자의 앉은 자리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새 나무 친구를 사귈 때마다 다시 읽고 싶어지는 그림책이다.
“처음엔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라는 문장에 부끄러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매화나무와 벚나무를 구분하지 못하던 몇 년 전 나를 떠올린다. 앵두나무에 열린 앙증맞은 앵두를 보고 호들갑 떨던 나와 동그랗게 웃던 어린 딸을 떠올린다. ‘목련은 꽃만 큰 줄 알았는데 잎도 크구나’ 놀라던 지난봄의 나를 떠올린다.
나무에 가까이 갈수록 놀랄 일은 더 많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활엽수와 침엽수, 꽃이 예쁘거나 단풍이 고운 나무 정도뿐이지만. ‘다 다른 나무’라는 걸 알아차리려면 거리를 좁히고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언제쯤 꽃이 피는지 기다리고, 모르는 꽃은 검색해보고, 잎과 씨앗의 모양도 궁금해하고, 나무껍질에 가만히 손을 대어보면서.
나무를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그림책 속 나무들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와 당신의 빛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짝이는지 생각해본다. 기다려보고 궁금해할수록 선명히 보이겠지. 다른 방식으로 피고 지는 온 세상 나무들처럼, 분명 다 다르고 그래서 더 찬란할 것이다. 그러니 “나무를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오늘도 새 나무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순진한 기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