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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May 05. 2022

내가 쓰는 나의 이야기

나를 찾아가는 그림책 여정 (1) 

우리는 매일 이야기를 쓰며 살아간다. 글이나 그림으로 꼭 남기지 않더라도, 삶은 그 사람만이 살아낼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책’이라 부르는 것도, 표지도 내용도 활자도 두께도 다르지만 제각기 재미와 의미를 전달해주는 책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림책 모임을 해보면, 그림책 자체도 좋지만 거기에 곁들인 그 사람의 이야기가 더 큰 감동을 줄 때가 많다. 


삶의 이야기를 잘 풀어가기 위한, 다시 말해 잘 살기 위한 삶의 조건은 각기 다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보편적인 삶의 자세 혹은 태도는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찾아가는 그림책 여정”의 첫 글에서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3권의 그림책과 함께 ‘내가 쓰는 나의 이야기’의 필요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는 마리안나 코포의 아기자기한 그림체가 독자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백지 한 장으로 시작된 책 위로, 사랑스러운 동물 친구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동물들은 이곳이 책 속임을 깨닫고, 가만히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야기는 오지 않는다. 때로는 지루해하며, 때로는 걱정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  


반면 함께 놀자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토끼는 혼자 크레용을 들고 화면 구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비를 피해 도망가던 동물들은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한껏 즐겁게 논다. 마침내 도착한 이야기 배달부에게, 동물 친구들은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 중 한 장면, 마리안나 코포


백지처럼 알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우리는 자주 망설이고 두려워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좋은 선택지가 있지 않을까. 숙고하는 자세는 좋지만, 적어도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여야 한다. 크레용을 직접 쥐고 일단 움직이고 쓰기 시작할 때, 삶도 이야기도 마치 나무처럼 자라난다. 누군가가 써준 이야기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 손과 몸을 움직여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온 의미는 알 수 없어도 의미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여정이며, 인생을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이 그림책은 일러준다. 


<빨간 아기 토끼>는 옛이야기 “빨간 모자”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빨간 페인트 통에 빠져 빨갛게 변한 토끼가, 길을 나섰다가 동화 속 주인공 빨간 모자를 만난다. 빨간 모자 이야기를 알고 있는 토끼는, 그 결말이 너무 끔찍해서 빨간 모자에게 차마 이야기해줄 수가 없다. 반대로 빨간 토끼 이야기를 알고 있던 소녀도, 그 결말이 너무 잔인해서 빨간 토끼에게 이야기해줄 수가 없다. 고민하던 둘은 바로 그 숲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바꾸어 책 쓴 어른들을 놀래 주기로 결심한다. 이 숲에는 늑대도 사냥꾼도 없다고, 할머니는 건강해서 병문안을 갈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마침내 둘은 바구니를 열고 먹고 마시며 행복한 소풍을 즐긴다. 


어린 소녀와 토끼는 과거의 전제 조건들을 바꾸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운 상상을 한다고 해도 숲 속 늑대와 사냥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위험은 우리 앞에 웅크려 숨어 있다가 발을 건다. 두 친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려 애쓰는 마음이다. 두렵다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 사건의 발단인 간식 바구니를 한껏 펼쳐 이 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용기. 덕분에 나의 이야기는 날마다 새롭게 쓰일 수 있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려는 태도, 바로 지금에서 도망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나 하나라면 그 이야기는 얼마나 심심할 것인가?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나의 몫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늘 조력자와 등장인물들이 필요하다.  


<이야기 담요> 속 아이들은, 이야기 담요에 둘러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느 날 한 아이 신발의 구멍이 눈에 띈 할머니는, 이야기 담요를 조금 풀어 뜬 양말을 몰래 선물했다. 그 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비밀 선물을 하나씩 받게 되었다. 모두에게 선물이 돌아간 날 이야기 담요는 끝내 사라지고 만다. 받은 선물이 이야기 담요에서 비롯되었음을 안 마을 사람들은, 집에 있던 담요의 털실을 풀어내 할머니에게 보냈다. “할머니, 이야기 담요를 새로 짜 주세요!” 아이들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 담요에서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야기 담요는 이제 다른 아이의 스웨터로 변신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털실이, 또 다른 온정이 이야기 담요를 채워주겠지. 이야기는 홀로 존재하던 사람들을 한 데 엮어준다. 흘러가 다른 이의 마음을 데워주고 또 다시 나에게 흘러 들어온다. 혼자라면 이야기 담요에 앉을 이도, 이야기 담요에 필요한 털실을 구해줄 이도 없다.  


내 인생의 이야기 담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에서 토끼가 그린 이야기를 즐겨줄 동물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빨간 아기 토끼>에서 소녀와 아기 토끼가 함께 길을 걸었기에 새롭게 이야기를 써볼 수 있었던 것처럼. 올해 각자가 쓸 이야기 속에 아름다운 동반자들이 많이 있기를,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에 나도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2020. 월간 그림책) 



소개한 책

<이야기 기다리던 이야기>, 마리안나 코포, 딸기책방  

<빨간 아기 토끼>, 라스칼 글 / 클로드 뒤브와 그림, 마루벌

<이야기 담요>, 페리다 울프 & 헤리엇 메이 사비츠 글 / 엘레나 오드리오솔라 그림, 국민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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