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그림책 여정 (2)
식물이 해를 향해 머리를 들고 자라나듯, 사람도 빛을 좇으며 살아간다. 어둡고 조용한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가 빛과의 조우다. 밤이 되면 잠들고 아침이면 일어나 새 하루를 시작한다. 낮이 길어지는 기점인 동짓날은 동서양 모두 큰 축제였다. 환하고 따스한 생명력, 그것을 좇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듯싶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빛이 생명을 살리는 건 아니다. 찬란하게 빛나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빛을 맹목적으로 좇다가는, 불나방처럼 단숨에 타죽을 수도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목마르고 외로워지는 길. 그건 아마도 내 안에 숨겨진 따스한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직 밖에서 화려한 불빛을 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몰리 아이들이 쓰고 그린 『펄』(몰리 아이들 글·그림 / 보물창고) 은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그림이 부드럽게 독자를 감싸 안는다. 펄은 깊은 바닷속 거대한 생물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어린 인어다. 하지만 엄마가 펄에게 안겨준 것은 그저 작은 모래알 하나일 뿐. 아주 소중한 걸 보살피게 될 거라더니, 모래사장 전부도 아니고 고작 모래 한 알이라니…. 펄은 크게 실망한다. “가장 작은 것들이 때로는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단다”라는 엄마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모래알을 꼭 그러쥔 손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한 후, 펄은 모래알을 소중하게 돌보기 시작한다. 펄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모래알은 점점 밝아져 온 바다를 비추는 달님으로 떠오른다.
빛을 좇는 이는 결국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이다. 내가 세상에 온 이유, 존재의 의미, 세상에 남기고 싶은 영원한 것. 그렇게 밝고 환하고 깊은 것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잡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먼 곳에 있는 빛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정말 내가 원하는 빛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홀리듯 따라.
결국 펄이 갖게 된 보물은 저 멀리에 있던 게 아니었다. 처음 손에 들어온 모래알은 작고 미약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품고 어르고 달래며 키워준 것이 세상에 의미를 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이 무엇보다도 환하게 비추는 것은 다름 아닌 펄 그 자신이다. 바깥세상의 큰 것을 열망하던, 작은 것에 실망하던 펄은 어느새 달라졌다. 평온하게 웃음 짓는 펄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사람의 의지와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세상을 덥힐 가장 따스한 온기라는 걸 새삼 느낀다.
그렇지만 내 안에 따스한 빛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믿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시시때때로 분노하고 우울하고 침잠한다. 상황을 뚫고 나갈 힘이 내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내 안에 빛이 있다는 가르침은 따분한 설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내 안에서 믿음의 불씨가 사그라질 때, 나는 까르르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무엇을 잘하고 특별히 잘나서 사랑스러운 게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자라나는 모습이 눈부시다. 우리는 모두 그 빛으로부터 태어났다. 비록 어른이 되어 생명과 성장의 흔적이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탄생의 빛은 여전히 나를 걷고 뛰고 날도록 만든다.
레지나 작가의 『바로 너야』(레지나 글·그림 / 글로연)는 그 탄생의 빛을 느끼도록 해주는 그림책이다. 이 책에는 글이 없다. 남색, 금색, 백색이 주조색인 그림 또한 추상적이라 어떠한 서사나 의미를 찾으려 든다면 그림의 진가를 마주하기 어렵다. 이 책은 마음을 열고 눈을 뜨고 ‘받아들여야’ 하는 책이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별처럼, 씨앗 속에서 태어난 꽃처럼, 우리가 가능성이자 희망 그 자체임을....... 하나의 씨앗과 다른 씨앗이 만나 유일무이한 생명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그 과정을 이겨낸 존재 자체로 우리는 충분히 근사하다는 것을 『바로 너야』는 말없이 전해준다. 작곡가 김현의 음악과 함께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책 속으로 젖어들 수 있다.
“그토록 밝던 존재의 빛은 어린 시절로 끝나버렸어”라고 자조할 수도 있다. 어른이 되면서 존재 자체만으로 칭찬받는 일은 드물다. 하루하루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생명의 기운도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그럴 때 『낡은 타이어의 두 번째 여행』(자웨이 글 / 주청량 그림 / 노란상상)을 읽으며 다시금 내 안을 들여다본다. 타이어는 자동차와 함께 곳곳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누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동차가 멈추게 되자 타이어는 차에서 떨어져 나와 새 길을 달리며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 어느 날 바위에 부딪히며 타이어의 여행은 끝이 나고, 그렇게 그의 존재는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멈추어야만 하는 그 순간은 절망이지만 새로운 시작도 그곳에서 꽃핀다. 타이어의 견고함이 달리기에 적합했던 만큼, 가운데 빈 공간은 누군가를 품어줄 만큼 넉넉하다. 타이어는 생쥐 친구들의 놀이터가, 개구리의 수영장이, 동물 친구들의 무대가, 마침내는 파릇한 새싹을 틔우는 텃밭이 되어준다. 주인공보다는 배경일지라도, 그의 빈 공간은 다른 이들을 키우고 채워준다.
나를 성장시키는 빛,
누군가를 품어주는 빛,
마침내 다시 나를 밝혀주는 빛.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우리는 빛의 한 조각이다. (2020. 월간 그림책)
소개한 책
<펄>, 몰리 아이들 (보물창고, 2020)
<바로 너야>, 레지나 (글로연, 2018)
<낡은 타이어의 두번째 여행>, 자웨이 글 주청량 그림 (노란상상,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