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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Apr 29. 2022

당신과 '자전거 거치대 만한 슬픔'을 나누었으니,

<이 다음 봄에 우리는>, 유희경

겨울 끝자락에 이 제목을 보고 호시탐탐 멤버들과 꼭 읽어보고 싶었어요. 이 다음 봄에 우리는, 시인은 그 뒤에 무어라 말할까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저는 그때 한창 겨울이었고, 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을 뻗던 사람이었어요. 봄 한 글자라도 주우면 좀 빨리 따뜻해질까 싶어서요.


유희경의 <이 다음 봄에 우리는>은 봄보다는 겨울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겨울을 건너뛰고 가을에서 봄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요. 커다랗게 웅크린 겨울의 등을 볼 때마다 두드려주거나 도닥여주거나 꼭 안아주고 싶은, 동지의 마음으로 읽던 시집이었죠.



톱을 사러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철물점은 문을 닫았길래 좀 먼 곳까지 걸었어요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샀습니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귤 담은 비닐보이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지 뭔가요 (....) 한두개쯤 흘린 것 같은데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귤이 자라 귤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귤을 심으면 귤이 자라나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귤 나무가 자라면 이 톱으로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혼자 웃기도 했븝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귤은 모두 꺼내두었는데도 그 뒤로 한 며칠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않아요 톱이요? 톱이란 게 늘 그렇듯이 쓰고 어디다 잘 세워두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톱과 귤: 고백 1" 중


톱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날카롭고 가시 돋고 차갑고 나무를 베어 버리는, '자르는 마음'이겠지요. 그러면 귤의 마음은요. 동그랗고 향긋하고 나누어 먹을 수 있고 씨앗이 되기도 하는, '자라는 마음'이겠고요. 자라는 마음은 눈에 안 보여도 결국 자르는 마음을 이기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오랜만에 동그랗게 귤처럼 웃었어요. 겨울에 우리가 귤을 까먹는 이유는 이런 걸까, 싶기도 했고요.


이제 톱을 볼 때마다 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 시를 떠올리게 되겠지요. 그런데요, 정말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건 따로 있었어요.  



나는 자전거 거치대 옆에서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굳건하며 단단해 무엇이든 붙들어 놓는다

자전거 거치대만한 슬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러니 관리대장도 없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흉물일지라도 자전거 거치대가 아닐 수 없는 것처럼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대해 생각했으며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생각했으며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아름다운 네가 걸어온다 멀리서 이쪽으로 자전거 거치대 쪽으로 그 옆에 있는 나의 쪽으로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 쪽으로 아름다운 네가 걸어온다 자전거 거치대를 그 옆의 나를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을 지나쳐 멀어져 간다 그러나 자전거 거치대는 그 옆의 나는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지 주인이 없는 것은 버려지지 않으니까

- "자전거 거치대 만한 슬픔" 중



옴짝달짝할 수 없는 커다란 덩치, 찾아가지 않는 버려진 자전거만 가득한 자전거 거치대. 이 시를 함께 읽은 우리는 이제 '자전거 거치대 만한 슬픔'을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덩그러니도 아니고 홀로도 아닐 거예요. 자전거 거치대를 스쳐갈 때,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기둥에 손을 한 번 얹을 때- 우리는 서로를 생각할 거예요. 내가 당신을 생각하듯, 봄을 생각하듯.


살면서 자전거 거치대를 눈여겨 바라본 적이 있나요? 저는 특별히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몰랐다고 자전거 거치대가 없었던 건 아니지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사물이 '분명 거기 있다'고 시인은 이야기해줘요. 자전거 거치대가, 저녁이, 열두 개의 의자가, 이건 존재의 기적이에요. 시인의 눈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의 존재를 시인은 계속 이 세계로 소환해줘요.


우리는 시를 쓰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함께 시를 읽겠다고, 봄밤에 술을 마시다 말고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일기를, 그림책 소개글을, 블로그 단상을, 무엇이라도 쓰는 사람들이에요. 때로는 못 쓰지만 '쓰려는 사람들'이에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기만 하면, 시인이 소환해준 마법의 세계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우리를 시인은 '선한 사람'이라고 불러줬어요.   


그러니까
선한 사람 당신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해서
앉아 있는 것이다
쓰려는 사람처럼
한밤중에 아침볕 아래
오후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림자를 따라가며
선한 사람 당신은
기울이듯
기울어가며
하얀 사각 종이를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사랑할 것이다

선한 사람 당신 곁에
나는
작은 화분을 두고
어제와 오늘을 키운다

- "선한 사람 당신" 중



그러니 이 다음 봄에 우리는

분명 시를 읽고 있을 거예요.

서로의 목소리를 모아 시를 낭송할 테고,

쓰려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있겠죠.

당신과 '자전거 거치대 만한 슬픔'을 나누었으니,

읽고 쓰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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