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음 봄에 우리는>, 유희경
톱을 사러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철물점은 문을 닫았길래 좀 먼 곳까지 걸었어요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샀습니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귤 담은 비닐보이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지 뭔가요 (....) 한두개쯤 흘린 것 같은데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귤이 자라 귤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귤을 심으면 귤이 자라나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귤 나무가 자라면 이 톱으로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혼자 웃기도 했븝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귤은 모두 꺼내두었는데도 그 뒤로 한 며칠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않아요 톱이요? 톱이란 게 늘 그렇듯이 쓰고 어디다 잘 세워두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톱과 귤: 고백 1" 중
나는 자전거 거치대 옆에서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굳건하며 단단해 무엇이든 붙들어 놓는다
자전거 거치대만한 슬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러니 관리대장도 없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흉물일지라도 자전거 거치대가 아닐 수 없는 것처럼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대해 생각했으며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생각했으며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아름다운 네가 걸어온다 멀리서 이쪽으로 자전거 거치대 쪽으로 그 옆에 있는 나의 쪽으로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 쪽으로 아름다운 네가 걸어온다 자전거 거치대를 그 옆의 나를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을 지나쳐 멀어져 간다 그러나 자전거 거치대는 그 옆의 나는 자전거 거치대만 한 슬픔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지 주인이 없는 것은 버려지지 않으니까
- "자전거 거치대 만한 슬픔" 중
그러니까
선한 사람 당신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해서
앉아 있는 것이다
쓰려는 사람처럼
한밤중에 아침볕 아래
오후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림자를 따라가며
선한 사람 당신은
기울이듯
기울어가며
하얀 사각 종이를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사랑할 것이다
선한 사람 당신 곁에
나는
작은 화분을 두고
어제와 오늘을 키운다
- "선한 사람 당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