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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May 23. 2022

(5.22) 애는 업을 거야

조건도 바람도 없이 내어주는 등

드라마를 제대로 안 본지는 꽤 되었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그런 것도 있지만,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잘 보지 않게 된다. 기쁘고 슬프고 먹먹한 복합적인 감정들을 1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느끼는 게 벅차다. 정말 기다리던 배우가 돌아온 경우에만 가끔 찾아보고, 나머지는 유투브에서 유명하다는 클립만 찾아보곤 한다.


<나의 해방일지>도 그렇게 띄엄띄엄 클립으로만 보고 있었다. 전작 <나의 아저씨>를 보지 않아, 작가의 스타일이 어떠한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추앙' 신을 마주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제 헌 타이어처럼 닳아빠졌거나 주고받을 것이 있을 것만 같은 단어로 뭉개져 버렸지. 조건도 이유도 없이 오직 존재를 안아줄 뿐인 행위, 작가는 그것을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에 실어 전하고 있었다.


사실 그 단어는 마음에 꼭 들어오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 만나기에는 너무 생소하고 뜬금없다고까지 느껴진 데다, 일종의 권력관계가 연상되어서. 물론 서로가 서로를 추앙하는 관계라지만, 그 단어에 붙어 있던 본래의 뜻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정말 좋아하게 된 대사를 만났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너도.... 웬만하면 서울 들어가 살아. 응? 평범하게 사람들 틈에서."

"지금도 평범해. 지겹게 평범해."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너네 오빠 말처럼 끌어야 되는 유모차를 가져야 되는 여자들처럼."

"애는 업을 거야."

"........"

"당신을 업고 싶어. 한 살짜리 당신을 업고 싶어." 






이유불문 아이가 울면 들쳐 업고 안아들던 시절이 있었지. 내 온 몸으로 아이을 받쳐 들어야만 잦아들던 울음이 있었고. 말할 때마다 나와 아이의 온 몸이 같이 울리고, 살이 맞닿아 서로의 체온이 같아진다. 땀이 나고 허리가 아프지만, 너에게 아무런 조건도 바람도 없이 그저 등을 내어주는 마음이 있었다. 사는 동안 모두들 그 마음을 찾아 얼마나 많이 숨죽이며 울고 헤매이는지.


첫째 아가 시절


첫째가 수영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셔틀 버스를 기다릴 때, 둘째와 함께 나간다. 그때 꼭 둘째를 업고 걷는다. 아직 20kg가 되지 않은 가벼운 아이지만, 여덟살 짜리를 업고 오가는 길이 만만하지는 않다. 그래도 그렇게 한다. 아이는 아기 원숭이처럼 내 목을 감싸고 나는 두 손으로 탄탄하게 아이의 엉덩이를 받친다.


그리고 봄밤의 바람처럼 느릿하게 걸어간다. 네가 너무 빨리 무거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너를 이렇게 업을 수 있어 기쁘다. 너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 기쁘다. 너의 고개가 잘 익은 사과처럼 내 등에 폭 떨어지는 순간, 나는 한 살짜리 너를 업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너는 언젠가 이 등을 기억할 수 있을까.




#추앙 #나의해방일지 #애는업을거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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