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순례>를 읽으며 유튜브로 수어 단어를 익히기 시작한지 이제 꼭 7일차. '손사탕'님의 강의를 보며 공부하고,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이나 농인들의 콘텐츠를 간간히 살펴본다. 인사, 감정, 시제, 날씨에 이어 오늘은 숫자 수어를 조금 익혔다. 새끼 손가락만 구부리고 다른 손가락은 다 펴야 하는 8이나, 검지는 구부리고 중지만 펴야 하는 12가 잘 안 되서 애를 먹는다.
검지를 구부린 채 손가락을 차례로 펴나가는 18, 19는 더 어렵다. 애꿎은 약지 마사지를 꾹꾹 해본다. 다 뻣뻣한 약지 때문이라는 듯이.
어제 해본 걸 복습해 보면 반은 까먹어서 다시 연습을 해야 한다. 3일 전 배운 건 오죽하랴. 주로 산책하면서 중얼중얼 꿈질꿈질 연습을 한다. 화가 났다가 불안했다가 행복했다가 기뻤다가...... 순식간에 온 몸이 여러 감정들로 옮겨간다.
배운 단어 중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계절'이다. 왼손은 엄지만 구부려 네 손가락을 펴고, 오른쪽 검지로 네 손가락 주위를 한바퀴 빙글 돈다. 사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표현한 단어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수어의 모든 단어가 이렇게 직관적인 건 아니라, 더더욱 이 단어가 좋다.
그리고 오늘은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은지 3일차. 둘째날 실수로 아이 소시지 빵 한 입을 먹은 것 빼고는 무난히 잘 넘어갔다. 오늘 점심 엄마가 만들어준 찹스테이크나 남편이 저녁으로 시킨 돈까스도 입에 대지 않았다. 생각보다 막 땡겨서 괴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동안 계란도 먹고 빵도 먹고 디카페인 라떼도 마셨다. 고기도 땡기면 먹을 거다. 다음주에는 둘째 친구 가족들과 캠핑이 있어, 아마 먹게 될 것이다.
비건이 되겠다고 선언은 못하겠고, 그저 비건으로 조금 기울어져 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실 나는 고기를 무척 좋아해왔다. 금요일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먹는 치킨도 좋아하고, 한적한 주말 저녁 남편과 연애시절부터 다니던 철길 왕갈비살도 좋아한다. 파김치와 함께 구워먹는 삼겹살도, 달큰한 돼지갈비도 좋아한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카레에 넣던 돼지고기, 볶음밥에 넣던 베이컨, 반찬하기 싫은 날 구워먹던 햄이나 삼겹살- 이런 것들은 할 수 있는 한 줄여보고 싶다. 계란 끝의 숫자를 확인하고, 동물복지 농장 마크를 확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완전하지는 못하겠지만, 비건과 논비건 사이를 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비록 3일차이고 7일차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 변화를 아끼는 눈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어디까지 더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지 좀 더 가보고 싶다.
(6.12) 다른 듯 닮은 이야기를 닿게 하는 곳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듯,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요즘 내 관심사인 비건과 수어로 대체 어떻게 흘러온 건가 싶어 더듬어 보았다.
올 초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차라리 무어라 명명된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는 게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울증으로 발전하는지 알고 싶어 여성 정신 질환을 다룬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관련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울증, 불안장애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며 시청하다 보니, 어느새 유튜브가 '자폐'라는 키워드를 내게 내밀었다.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궁금하여 한참을 따라가며 보았다. 그러자 유튜브가 또 어느 날 뇌병변 장애인 구르님의 채널을 소개해 주었다. 그 채널을 통해 하개월이라는 청각 장애인을 알게 되었고, 그쯤에 이르자 내가 장애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받았던 <사이보그가 되다>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연달아 읽었다. '책은 도끼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모든 것이 새롭고 하나하나 질문 투성이라 머리를 싸매고 읽었다. 어려워, 그런데 세계가 넓어지는 이 멀미나는 여정을 멈추고 싶지는 않아.....
마침 알라딘 신간 추천에, 두 책의 저자인 김원영 작가가 추천사를 쓴 책이 올라왔다. 청각장애인 사진가 사이토 하루미치의 <목소리 순례>였다. 작가의 <서로 다른 기념일>까지 읽으며 농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어를 배우고 싶어 유튜브에 검색하여 단어를 외우고 있다. 대면으로 배울 수 있는 곳도 찾아두었다. 일단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유튜브로 꼼지락거려야지.
관련한 책으로 수하님이 <짐을 끄는 짐승들>을 추천해주셨다. 비장애중심 사회가 장애와 동물을 대하는 억압적, 폭력적 방식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최소한 습관적으로 먹던 고기라도 줄이자는, 나로서는 엄청난 결심을 했다.
유튜브로 깔깔 웃기는 예능이나 드라마 클립도 많이 보지만, 최근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보았다. 자폐아를 키우는 엄마, 다운증후군 화가, 휠체어를 디자인하는 뇌병변 장애인, 농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청각 장애인. 내가 몸으로 만나보지 못했던 세계가 그 안에 있었다. 유튜브가 이토록 고마워본 건 처음이다.
알고리즘이 무섭기도 하지만, 다른듯 닮은 이야기를 닿게도 하는구나. 이제 이 다음 이야기는 어디로 이어질까. 한참은 더 이곳에 머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