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몸에 난 눈물 구멍

달리기만 하는 몸은 맹렬한 여름이 된다

by 안개향

2016년 초, 육아 휴직 중 한겨레 어린이청소년 번역가 그룹에 막 들어간 나는 퇴사 전까지 어떻게든 번역 계약서를 쓰고 싶었다. 확신이 없는 상태를 가장 불안해하는 극 J형으로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 퇴사를 하려니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책 목록 중 골라 번역 기획서를 꾸준히 썼다. 채택되기 어렵다는 그림책 번역 기획서를 개인적으로 써서 돌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회신이 오지 않았고, 돌아온 답도 정중한 거절이었다.


4월부터는 출판사 요청으로 출판 검토서도 썼다. 3주 내에 300페이지 청소년 소설을 읽고 10쪽 남짓 검토서를 썼다. 처음으로 통장에 10만원이 찍혔다. 세금 떼고 9만 얼마의 숫자가 찍힌 문자를 보자마자 울컥 울음이 터졌다. 아이를 재우고 매일밤 앉던 식탁 구석 자리에서 다른 기획서를 쓰고 있던 때였다. 아이들이 없거나 잠든 시간에 잠을 줄여 쓴 기획서로 번, 작지만 큰 돈이었다. 가족 공용 통장에 옮기지 않고 꽤 오랫동안 개인 통장에 갖고 있었다.


2016년 말 우연히 그림책 테라피 일을 시작한 후, 2017년부터 일이 조금씩 생겼다. 내 능력으로 받았다기보다 좋은 인연들 덕에 감사하게 기회가 생겼다. 돈도 돈이지만 이력을 만들기 위해, 돈은 거의 안 되는 수업도 수차례 만들어 열었다. 일을 거절하면 다시는 일이 안 들어올까봐 어떻게든 수락하려 머리를 굴렸다. 내 첫번째 일은 언제나 육아였지만, 가능만 하다면 아이를 맡기고 멀리도 가고 늦게도 나갔다.


그토록 집 밖으로 나가려던 건 내가 ‘쓸모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한 분투였을 것이다. 땀 흘리며 아이 둘과 씨름하다 둘째가 뿌엥 울며 뒤로 나자빠질 때 훅 깨어져 버리는 자기 효능감을 어떻게든 되찾고 싶던 젊은 엄마의 악다구니.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고 책을 짊어지고 기차에 몸을 싣는 모든 과정이 고단한데도, 차창에 비친 얼굴의 입꼬리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기쁨이 다시 한 번 짐을 꾸렸다 풀게 했다.


내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의 이면에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는 압박이 있다.


무슨 일을 했건 상관없이 직장인은 회사에서 시간을 채우면 월말에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온다. 반면 프리랜서의 일은 모두 각개 전투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이 들어와야 한다. 인맥과 능력과 시간이 쌓여 일이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내가 일을 만들고 홍보하고 연락을 돌리고 성과를 내야 한다.


프리랜서 7년차인 지금도 수업을 만들어 알리고 홍보하며 돈을 번다. 내 뜻대로 일정과 커리큘럼과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기다리기만 하기엔 아직 일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다. 의뢰 들어오는 비슷한 수업만 반복하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밥줄이 곧 끊이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자꾸 새로운 수업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보고 SNS에 피드를 올린다. 감 떨어지면 안 된다, 잊히면 안 된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2016년 고군분투하던 첫 시절은 어땠을까. 그때는 프리랜서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수입이 적었다. 번역기획서 서너 개로 번 몇십만원, 경영경제서적 번역 계약하며 선입금 받은 몇십만원, 그리고 첫 그림책 테라피로 받은 몇 만원. 다 합쳐야 1년 수입이 100만원이었다. 공부 시작하고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하지, 처음으로 돈을 벌어본 게 대견하지- 한켠에서는 우쭈쭈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건전지가 거의 닳은 시계처럼 조바심이 났다.


얼른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2015년 번역 공부를 할 때부터 잠을 줄였다. 아이 둘을 재우고 11시가 다 되어 식탁 구석에 앉아 새벽 2시까지 깨어 있었다. 번역 기획서를 쓰거나, 아마존을 뒤지며 기획서 쓸만한 책들을 찾거나, 누가 찾아주지도 않는 그림책 관련 글을 쓰고 고쳤다. 빨리 나를 한 단어로 설명하고 싶었다. 번역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가라고 불리고 싶었다. 돈과 효용감도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지만, 불안이야말로 가장 힘 센 엔진이었다.



내일이 오늘과 똑같으면 어떡하지, 계속 아무 이름이 없는 채로 살면 어떡하지. 매일 글을 쓰며 나를 달랬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불안이라는 감옥은 계속되었다. 감옥에서 나가는 방법을 몰라, 그나마 몸뚱이를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다. 자지 않고 멀리까지 다니며 이름을 얻기 위해 애써 일했다. 그러면 불안이 제법 잊히는 듯 했다. 몸을 상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아픈 건 힘들다기보다 성가신 일


2017년 늦가을 대구에서 올라오던 기차 안, 잇몸이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진통제 먹고 버텨보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염증이 심해져 사랑니를 뽑고 잇몸 치료를 받아야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턱과 목 주변이 하얗고 노랗게 곪으면서 주변이 붉게 변했다. 평소 나던 화농성 여드름과 달리 쓰리고 따가워 피부과에 가보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루성 피부염이라고 했다. 약을 먹으면 잠시 괜찮아졌지만, 약을 끊으면 이내 붉게 달아오르며 곪아 들었다.

염증은 잇몸, 혀, 얼굴, 등, 방광, 엉덩이 등 온 몸을 돌아다니며 약을 올렸다. 한 쪽이 나으면 다른 쪽이 말썽이었다. 하지만 염증이 총체적으로 고민해봐야 하는 건강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방광염은 산부인과에서, 피부염은 피부과에서, 치주염은 치과에서 해결해야 하는 단기 과제라고만 여겼다. 아픈 건 힘들다기보다 성가신 일이었다. 아픈 치료 과정도 싫지만, 예약을 잡고 병원에 오가는 일이 더 귀찮았다.


프리랜서 워킹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을 잡아먹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내 몸이라 할지라도. 그러니 증상이 완화되면 병원도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한 불은 껐으니, 굳이.


그렇다고 염증을 줄이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일과 육아 사이 대충 먹을 것을 우겨 넣고 짧고 얕은 잠을 잤다. 숨쉬기와 약간의 걷기가 움직임의 전부였다. ‘원래 염증이 잘 생기는 체질이야’라고 합리화하며, 어지간히 아픈 일은 참고 정말 아플 때에만 빠르게 병원을 다녀오는 삶을 몇 년 간 지속했다.




하지만 느 한여름 등에 생긴 커다란 낭종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뾰루지인 줄 알고 곧 가라앉겠지 싶어 그냥 두었다. 열흘이 되도록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똑바로 누워 자기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동네 피부과에 갔더니 진피 아래 각질과 부산물이 곪아 커진 ‘표피 낭종’이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와 달리, 의사는 열이 나면 바로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외과를 겸하는 큰 병원에 가라고 소견서를 써주었다.


종합병원에서 들은 말은 내 생각보다 심각했다. 염증이 심해 항생제로 염증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 이후 째서 고름을 짜낼 뿐 아니라, 수술로 낭종을 제거해야만 재발하지 않는단다. 경과에 따라 치료에 한 달 이상 걸릴 수 있고, 낭종 제거는 1박 2일 입원을 해야 한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고작 손가락 두어 마디의 낭종이........ 이럴 일이라고?


아무리 육아와 일이 먼저고 시간이 귀하대도, 아픈 몸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악착같이 시간을 내어 병원 예약을 잡는 수 밖에. 종합병원에서 며칠 간 항생제 주사를 맞고 마침내 피고름을 짜기 시작한 날, 무릎에 올린 두 손을 맞잡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등 한가운데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질러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 손톱에 살이 패이도록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온 분은 한참 소리 지르고 가셨는데. 너무 잘 참네요. 잘 했어요. 잘 하고 있어요.”


갈 때마다 소리 한 번을 안 내니, 하루는 간호사 선생님이 꼭 쥔 주먹을 살포시 잡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팍 터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잘 하고 있다’는 말 앞에서 불안으로 지은 감옥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잘 참고 있다는 말을 듣자 외려 하나도 참고 싶지 않아졌다. 아주 큰 소리로 어린 아이처럼 울고 싶었다. 사실은 아파요, 힘들어요, 불안해요.

몇 년 간 육아의 잔해를 해치고 새로운 일을 해내며, 그토록 바라던 이름을 얻었다. 번역가로, 그림책 테라피스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내며 작가라고도 불렸다. 일과 이름을 얻어 기뻤으나, 쁨은 금세 불안을 연료 삼아 몸에 불을 지폈다. 쉬지 않고 몸이 곪고 있다는 건, 쉬지 않고 마음이 곪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 나왔어요. 이거예요. 다행히 수술 따로 할 필요 없겠네요.”


의사 선생님이 핀셋으로 꺼낸 것을 거즈 위에 올려 보여주셨다. 피투성이에 쪼글쪼글 구겨진 비닐봉지 같은, 낭종이었다. 입원 수술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도 잠시, 대체 이게 뭔가 싶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커다란 비닐봉지 같은 게 몸속에 있을 수가 있다고?! 그건 도저히 사람의 몸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도 손도 잘 닿지 않는 등에서, 내가 눈길 주지 못한 사이 도대체 무엇이 자라고 있던 걸까.


내 몸을 안 보이는 등처럼, 아니 등짝처럼 취급하며 살아 날들이 피투성이 낭종 찌꺼기로 쭈글거리고 있었다. 그 날 마주한 내 몸은 커다란 쓰레기 집하장이었다.



3주에 걸쳐 항생제 주사를 4번 맞고 고름짜고 소독하는 일을 반복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키울 일이었나? 자궁 근종 제거 수슬을 할 때도, 잇몸 치료할 때도, 피부과 약을 먹을 때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빨리 해치우고 말 일이라고 생각했던 증상들이, 사실은 완전히 고장나기 직전의 징조들이라는 생각에 처음 닿았다. 달리느라 과열된 몸은 맹렬한 여름처럼 자라고 부풀다 결국 상한다는 걸. 참고 누르기만 했던 모든 불안과 초조와 욕심이 노랗게 곪고 딱딱하게 굳으면서, 이렇게 커다란 낭종이 되고 말았다는 걸.

잘 참았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 그래서 고마웠고 그래서 슬펐다. 참기만 하던 날들을 낭종처럼 쭉 째서 짜내버리고 싶었다. 나도 앞서 왔던 환자처럼 아프다고 소리 치고 싶었다. 지난날의 내가 미워지면서 깨고 싶고 부수고 싶고 울부짖고 싶고 비명을 지르며 까무라치고 싶었다*. 신줄을 잠깐 놓은 것처럼!


하지만 래 굳어 꽉 힌 몸에는 울고 소리칠 구멍이 없었다. 낭종을 짼 자리야말로 몸이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른 구멍이었다. 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팔을 뻗어 낭종이 있던 자리를 만졌다. 내 손을 덮어주던 간호사 선생님의 부드러운 손을 떠올리면서. 팔을 있는대로 뻗어야 간신히 닿는 자리. 싹난 감자를 도려내듯 낭종은 사라지고, 두툼한 밴드가 올려져 있었다.


그 자리로 햇빛이 소독약처럼 내려앉았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디로 흘러온 건지 고민해야 할 때. 나는 버스를 두 대 놓치며 가만히 소독약을 발랐다. 그리고 이제야 막 울기 시작한 등의 눈물 구멍을 쓰다듬었다. 가을로 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늦여름이었다.



* 최승자,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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