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어린이날, 첫째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곱게 공들여 길러왔던 길고 긴 머리카락을 댕강 잘라내 버렸다. 무려 2년 만에 짧아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가며 했던 그녀의 첫 대사는 "시원하네"였다.
1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교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뜸 자신도 기부가 하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머리카락을 기부할 수가 있다고. 머리카락이 숭숭 빠질 정도로 아픈 친구들에게 자신의 것을 선뜻 내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이 어찌나 예뻤던지. 난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2년간 단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 친구들을 따라 염색을 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거추장스러워서 잘라내고 싶었던 순간들도 무던히 참아냈다.
첫째는 긴 머리카락이 꽤나 잘 어울렸다. 아이도, 나도 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머리카락은 신체의 일부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일에 크게 보탬이 되고 있었다는 걸. 쉽게 말하자면, 그녀는 머리빨을 좀 심하게 받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날이 오지 않기를 조금은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자준 덕에 아이의 머리카락은 쑥쑥 자라났다. 그동안 숱도 많아졌고, 머리카락도 제법 굵어졌다. 길이도, 두께도, 머릿결도 기부하기에 괜찮은 조건이 되어갔다. 그렇게 5월 5일 어린이날, 첫째는 자신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어주었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내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자신의 선행이 누군가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머리카락을 다 자른 뒤, 나란히 거울 앞에 섰다. 아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했고, 눈부시게 맑았다. 어쩌면 그날만큼은 이 아이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걸 사주겠다며 장난감 가게에 데려갔지만 스티커 몇 장만을 골라서 나왔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1년에 한 번뿐인 어린이날, 받는 행복보다 주는 기쁨을 택했던 이 아이가 유독 어른만큼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작지만 의미 있는 나눔을 할 줄 알고, 그 선택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원으로, 또 그런 사회에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짧은 머리를 보고 흡족해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며 칭찬도 건넬 줄 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기부를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리곤 알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아이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작은 경험의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사회를 조금씩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은 다짐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변화는 언제나 사소한 결심 하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늘 이렇게 건강한 마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기를, 그 맑은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엄마로서, 그리고 먼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진심을 담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