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혀온다.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매년 찾아오는 이 여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다.
툇마루에 대자로 누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땀을 식혔을까. 아니면 우물에서 건져 올린 시원한 수박을 식구들과 쪼개 먹으며 더위를 달랬을까. 어쩌면 그저 더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지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씩 쏟아져내리는 소나기가 이토록 반가운 건 내가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몰아쳐 내리는 물줄기는 그 소리만큼이나 청량하고 시원하다. 뜨겁던 한낮의 기운들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한바탕 소나기가 휩쓸고 간 어느 여름날의 밤, 쉽게 잠들지 못하던 아들이 애원해 왔다.
"엄마, 산책 나가면 안 돼요?"
결국 우린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단지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적막하고 쓸쓸한 밤길이었지만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마주 잡은 우리의 두 손이 앞뒤로 흔들리며 온기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우리의 속도에 따라 달리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보세요! 그림자가 따라와요!"
나도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자꾸만 우리 뒤에 바짝 붙어있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아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조금 뒤에서 내 그림자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물어왔다.
"그림자가 없어지기도 해요?"
"햇빛이나 불빛이 없으면 그림자는 사라지지."
"그건 싫은데..."
아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커다래진 동공 속에 담긴 두려움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림자는 없지만, 엄만 언제나 너와 함께일 거야."
"어떻게?"
"여기, 이곳에 항상 있을 거거든. "
아이의 가슴에 손바닥을 살며시 얹고 대답했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보다 더 많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어른이라는 걸.
어쩌면 나는 아이보다 더 자주 무서워했고, 더 많이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 서툴렀던 오늘과 불확실한 내일을 살아내며, 그 마음들을 감춰야만 했던 건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른의 몫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최근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른의 몫이란 그저 강한 사람인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말없이 그저 곁에 있어주는 일이 아닐까. 조언보다 필요한 건 손을 잡아주는 것이고, 앞서 나가도록 격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가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주는 것 말이다. 그렇게 아이의 두려움을 함께 느끼고,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동행하는 것. 그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방식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비록 언젠가 곁을 떠날지라도, 아이의 마음속엔 그날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오래 남아 있기를. 외롭고 무섭거나, 슬프고 힘이 들 때 그 순간이 아이에게 용기를 건네줄 수 있기를. 흔들리는 순간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