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
여자에 미쳐 새 살림을 차리겠다고 엄마를 버린 아버지였다. 이모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내연녀들의 수는 상당했다. 열 손가락에 다 꼽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중엔 이십 대도 있었다. 당시 십 대였던 나와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은 아버지가 옷을 사준다고 하여 단 둘이 시내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짧은 통화를 마친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 놈이 애인이냐고 묻네. 집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시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그때를 곱씹으니 실소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를 만나는 일은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한두 해에 한 번꼴로 집에 방문해 밥을 먹고 갔다. 고작 한 끼 식사였을 뿐이지만 부정적인 말들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건재하던 모든 걸 무너뜨리고 잠식시켜 버렸다. 반찬이 짜다느니 간이 싱겁다느니 하는 말로 시작해 생활비를 허투루 쓰지 말고 아껴 쓰라는 잔소리로 흘러갔고, 다음 달부터는 지금처럼 못 준다며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놨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한 달에 한 번, 잊지 않고 생활비를 보내왔기에 그마저도 감사해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무책임하게 우리 남매를 버리지도 않았고, 가난에 허덕이게 만들지는 않았으니.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생활비가 매달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돈이 없다며 다음 달로 미루고선 어물쩍 넘어가는 달도 종종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아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엄마의 희망이었다. 그녀는 여린 불씨 하나에 모든 걸 걸었다. 딸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꿈은 그저 커다란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난 아직 십 대의 소녀였을 뿐인데, 엄마는 자꾸만 가장의 무게를 지게 했다. 꿈을 향해 달리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니라, 그저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도록 공부하라고 외쳤다.
추상적이고 막연하기만 한 그 외침 속에서 난 꿈을 잃어만 갔다. 선명하던 나의 꿈은 서서히 희미해져만 갔다.
나에게 사랑은 없을 거라 믿었다. 평생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며, 결혼은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이라 여겼다.
나뿐 아니라 남동생 또한 그랬다. 십 년 가까이 한 명의 여자친구와 교제 중이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결혼이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오거든 언제든 헤어져 주겠단다.
아마 우리 둘 다, 같은 이유로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던 내가 운명처럼 평생의 연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현재는 아이 둘을 낳아 단란하고 오붓한 가정을 꾸렸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다들 입모아 금메달이라고 얘기했다. 어쩜 자식도 그리 순풍순풍 잘 낳았냐고.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딸아이가 학교에서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들려주다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 우리 반에 결혼하고 싶은 친구가 몇 명인 줄 알아?"
"글쎄? 반은 되지 않을까? 한 12명?"
"놀라지 마. 딱 3명이야. 다들 결혼하기 싫대."
"진짜? 24명 중에 겨우 3명이라고? 결혼이 왜 싫다는 거야?"
"부모님이 맨날 '힘들다' 소리만 한대. 결혼하면 힘들 것 같은 거지."
"그렇구나. 너는 어떤 쪽에 손을 들었어?"
"엄마가 그랬잖아. 힘든 건 맞지만 그보다 5배는 더 행복하다고. 나도 그걸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결혼하고 엄마랑 같이 살 거야. 다~ 같이. 아래층엔 승기랑 부인이, 위층엔 엄마랑 아빠가."
아이의 대답이 매우 흡족스러워진 나는 곧바로 둘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결혼할 거냐고.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나와도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결혼하면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 거야."
소소소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행복을 가득 안은 따뜻한 솔바람이 내 가슴으로 파고 들어왔다.
둘째를 품에 넣고 꼭 끌어안은 채, 얼굴을 아이의 머리에 묻었다. 보송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였다.
부족했던 사랑 탓에 텅 비어버린 채 자라야 했지만, 아이들의 사랑 덕에 마음이 넉넉해진 나는 어쩌면 세상 제일가는 부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했다. 더 바랄 것도 없던 나는 오직 사랑,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