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을 내리 뒹굴거리며 책만 읽다가 수강 신청 기간이 다가오자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제관계학과에 들어갔지만 정치로 왈가왈부하고 논쟁을 펼치는 데에는 영 흥미가 없어서 전공 수업을 최소한으로 듣고자 영어영문학과를 복수 전공할까 말까 하던 고민이 그 계기였다. 마음 같아선 편입이던 재입학이던 유학을 하고 싶지만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리. 그러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정말 무엇을 위해 이리 사는지 알기 위해 내가 진심으로 살고 싶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경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나의 학창 시절 가치관은 여전히 성인이 된 지 2년 차 된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삼 일 전쯤 예니와 감사하게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날 이후로 대학 졸업 후에 대한 생각을 더 다양하게 해 볼 수 있었다.
사실 대학 졸업 이후 나 자신을 200% 책임져야 하다 보니 당장 나를 증명할 무언가가 턱없이 부족하니 내일이 지구 종말인 것처럼 엄청나게 긴박해하고 소위 남들이 하는 건 다 의식해서 해야 한다는 '물타기'를 중요시해왔던 터라, 계속해서 더 넓은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창고에 짐짝 놓듯이 놔두고 먼지가 내려앉도록 까먹고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로운 곳에서 전례 없던 경험과 사람들에 대한 욕망은 서서히 자연스레 포기 아닌 포기를 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니 미친 건가 싶었다. 다시 정신 차릴 타이밍이다. 레드썬!
물론 해보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하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흥청망청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원하는 바를 인생에 있어 가장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고 무얼 시작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이에 하고 싶었던 걸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것뿐이었다.
그냥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더라. 나도 내가 원했던 삶은 한국에서 열심히 살다 취업해서 열심히 살다 누군가의 배우자, 부모가 되는 게 삶의 목표는 아니었는데. 그저 외국이라면 카페 아르바이트만 하며 사람들을 만나도 외국어로 말을 하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작은 일상에 행복해하고 만족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더불어 코로나 걱정이 완전히 사라질 먼 훗날, 내가 외국 친구들과 호주 해변에서 수다 떨며 맥주를 먹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브라이언트 카페에서 아이스라테를 마시며 좋아하는 책을 읽는 옆 사람에게 재밌냐고 말 걸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한평생 내 흔적 하나 없었던 런던의 동네 카페에서 친구와 단골 인척 스콘을 주문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런 의구심이 마구마구 들었다. 누군가에겐 하루빨리 지나갈 일상일지라도 나에게는 그런 일상이 꿈 그 자체여서 그런지 여기서 이렇게 내 인생의 막이 내리게 된다면 설령 눈을 감게 되어도 너무나 억울해서 영영 이승을 못 벗어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모든 꿈과 목표를 다 만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이런 행복을 느껴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당장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엉금엉금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지만 내가 기다리는 무궁무진한 미래들이 나중에 드디어 왔다며 나를 따스히 반겨주는 광활한 장면을 선사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아직 처음인 것들, 즐길 것들이 차고 차고 넘치니 행복에 눈물 흘릴 나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내일은 제발 좀 덜 불안해했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