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매달려 8

by 브리

#수민, 인생을 깨닫다.


살다 보면 인생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현우와의 만남이 그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스웨덴 자기 방보다 더 큰 병원 침대에 누워 수민은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침 해가 환하게 떴다. 한두 시간 잠들었나? 루오를 배웅하고 바로 잠들었지만, 간호사가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며 들어오고, 상처에 약 발라야 한다고 들어오고, 반깁스해야 한다고 들어오는 바람에 일어나야 했다. 그 사이 아침도 먹고 약도 먹었다. 그랬더니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멀쩡해졌다.


“수민아. 내가 나중에 저녁에 다시 올게. 그때까지 좀 자 둬.”


낯가림이란 없는지, 루오는 20년 동안 꼬박 알아 온 것처럼 수민을 대했다. 루오는 어마어마한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잘 웃고 잘 떠들고 궁금한 것도 많고 집요하기도 한. 스웨덴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성격이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그렇지 개인적인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고 자신의 이야기도 거침없이 내뱉었다.


“한국은 왜 왔어? 왜 혼자 왔어? 부모님이랑 싸웠어? 머리는 원래 그렇게 짧아? 이런 옷 스타일 좋아해? 좀 매니쉬하게 입는 거 말이야. 대학생이라고? 방학인가? 뭐 먹고 키가 이렇게 컸어?”


질문에 대답해주다가 밤샐 뻔했다. “너는 나한테 궁금한 게 없어?”라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웃는 루오에게 “이모가 널 키우느라 정말 힘들었겠다” 소리가 목 끝까지 나왔다. 남자애가 어쩜 이렇게 사근사근해? 그리고 왜 이렇게 예쁘지? 수민도 창백할 만큼 하얗고 선이 가는 편이다. 그래서 운동을 하면서 불만이었다. 쉽게 근육이 붙지 않는 게 영 못마땅했다. 그런데 루오는 남자인데도 여자만큼이나 말랐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다. 가수라고 하던데.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다 이럴까? 수민은 루오의 성 정체성을 생각하다가 너무 나간 걸 깨닫고는 멈췄다. 한국에 와서 남자로 오인당한 자신도 있다.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남자. 명원도 있다. 루오와는 다른 의미로 아름다운 남자. 6피트가 넘는 키에 반듯한 이마, 신중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인사를 하고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는 손으로 몇 번 머리를 넘기더니 야구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수민을 똑바로 보았다. 연예인이라는 걸 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 그냥 봤다면 도서관이 더 어울릴 외모였다. 수민의 뺨을 만졌던 명원의 손가락 끝이 단단했던 게 기억났다.


“명원이 형은 우리 그룹 리더야. 이 병원이 명원이 형네 병원이거든. 원래 다른 사람들은 입원이 안 되는데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 ”

“왜 다른 사람들은 입원이 안 돼?”


수민의 물음에 명원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노인병 전문 병원이라 그래요. 그래서 젊은 사람이 환자로 들어오는 일이 드물어요. 그런데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가족들이 다 한국어로 대화해요. 심지어 토마스도 한국어로 해요.”

“토마스?”

“아. 새아빠예요. 토마스 안델슨. 우리 가족은 가구를 만들어요.”

“맞아. 새 이모부는 가구장인이래. 수호형도 거기서 일하고. 맞지? 수민이는 대학 다녀. 전공이 언어학. 그런데 수영 선수도 했고 요즘엔 클라이밍 선수로도 활약 중이래. 거기 사람들은 운동 한두 개는 다 필수로 한대. 대단하지 않아? 수민이한테 클라이밍 배워도 되겠다. 그렇지?”

“진정해. 그럴 시간이 되냐?”

“시간이야 내면 되지. 우리 활동 끝났잖아. “

“다음 앨범 준비 안 해?”

“형도 기타 치잖아. 나도 그것처럼 클라이밍 하는 거야. “


루오가 투정 부리듯 말하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었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안될 게 뭐 있어?”


그때 루오의 눈을 스쳐 지나가던 광채는 뭐였을까? 어쨌거나 루오는 수호를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지… 그리고 오빠랍시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는 듯 경계를 치는 듯한 느낌까지. 루오는 수민의 침대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명원이 세 발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수민은 이게 이 집안 남자들의 핏줄로 이어지는 병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수호는 정말… 자기가 무슨 봉건영주나 되는 양 거만하게 수민을 통제하려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우를 만난 건 기적이었다. 스웨덴이었다면 수호의 레이더에 걸려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였다. 현우와는 영국 클라이밍 대회에서 만났다. 자신은 스웨덴 대표로 출전했지만 뿌리가 한반도라 한국 대표가 궁금해서 힐끔힐끔 그쪽 천막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현우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현우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목덜미부터 이마까지 새빨개졌다. 왜 저러지? 하고 생각했는데 대회 둘째 날 아침, 그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수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점심때가 지나 간호사가 발 고정대를 들고 왔다. 검사 결과 다행히 금 간 것도 없고, 당분간 움직임에 주의만 하면 된단다. 발목 붓기도 꽤 가라앉았다. 소염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통증도 훨씬 덜했다. 수민은 얼른 병원을 나가고 싶었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루오였다. 루오때문에 다쳤지만 루오덕분에 무사히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떠났으니 기다리는 게 인간적 도리였다. 다른 하나는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거였다. 어제 입었던 옷은 피와 흙이 얼룩져서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샤워하면서 대충 빨았는데 건조기에 넣지 못해 아직도 축축한 상태다. 건조기를 찾으려고 병실 밖으로 나가다가 명원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만 잊어버렸다.


하아…. 옷을 좀 더 가져오는 건데. 티셔츠는 하나 더 있어 문제가 없지만, 청바지는 달랑 한 벌. 최대한 짐을 줄여 백 팩 하나만 메고 온 터라 옷은 당연히 빨아 입는다고 생각했다. 건조기가 없을지 누가 알았나? 지금이라도 건조기를 찾아야 한다. 수민은 발 고정대 사용법을 일러주고 나가려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저기요. 혹시 여기 토르툼라레(torktumlare,건조기)가 어디 있나요?”

“토르….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빨래를 말리는 기계요.”

“아! 빨래건조기요? 우리 병원에는 없어요. 대신에 병원 건너편에 코인 세탁소가 있거든요. 거기서 가면 돼요.”


간호사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수민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건조기까지 가려면 병원 밖으로 나가야 한단 말인데 병원 밖으로 나가려면 옷이 필요하다. 그러나 옷은 지금 젖어있다. 젖은 옷을 말리려면 건조기가 필요하고 건조기까지 가려면 병원 밖을 나가야 하고… 아아! 뫼비우스의 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역시 인생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수민은 욕실에 있는 드라이기로 청바지를 말려보기로 했다. 두 시간 정도면 다 마르지 않을까? 드라이기 바람이 세면 한 시간 안에 끝낼지도 모른다. 이 정도 노동을 해서 해결이 된다면 나쁘지 않다. 수민이 막 몸을 일으키는데 다시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들어왔다. 특실이라 그런지 의료진의 방문이 너무 잦다. 수민은 다시 얌전히 베개에 몸을 기댔다. 중년의 여자 의사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식사는 잘했어요?”


그녀의 가운에는 부원장 이문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수민은 그게 정확하게 어떤 직책인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문영은 침대 발치에 달린 차트를 확인하더니 이불을 걷어 수민의 발목을 체크했다.


“괜찮네요. 무리하지 않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루오 사촌이라면서요? 나는 명원이 엄마예요.”


수민은 머릿속으로 명원을 떠올렸다. 날렵한 콧날이나 분위기가 닮은 거 같기도 했다. 문영은 부드럽게 웨이브 진 단발머리에 검은 안경을 쓰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명랑한 분위기가 흐르는 분이었다. 수민은 덩달아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 에린 수민 안델슨입니다. 스웨덴에서 왔어요.”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한국에서 오자마자 그런 일을 당하고. 팬들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수민씨가 이해해요. “

“네. 그럼요.”

“회사 측에서 기사를 내서 헤프닝이었다고 설명을 했어요. 팬들도 사과문을 올렸고. 혹시 보상을 바라면 곧 이모님이 오신다니까 같이 상의해봐요.”

“예? 누가 와요?”

“루오 엄마요. 조금 전에 통화했어요. 조카분이 우리 병원에 와 있다니까 깜짝 놀라던데. 루오가 아직 말을 안 했나 봐. 남자애들이 좀 그래. 이런 중요한 일을 말을 안 한다니까.”


수민은 또 한 번 깨달았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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