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말리다
고민은 짧았다. 이문영 부원장이 돌아간 다음 수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에 펼쳐놓은 바지를 확인했다. 아직 축축했다. 잠깐 망설였지만, 수민은 환자복을 벗고 젖은 블랙진에 다리를 넣었다.
이모가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 애초 수민이 한국에 온 건 이모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안 그래도 길이 지체되었는데 이모를 만나면 시간이 더 걸릴 건 뻔했다. 그리고 수민이 가족 몰래 현우를 만나러 왔다는 걸 알게 되면 이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걱정된다며 막아서거나 스웨덴으로 전화를 넣을 수도 있었다. 수민은 루오에게도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은 사람을 찾으러 왔으며 이모는 나중에 만나겠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모든 건 현우를 만나고 난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몇 개 안 되는 짐을 가방에 넣으며 수민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떠나는 건 떠나는 건데 루오에게 말도 없이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쪽지라도 남길까? 그러나 바쁜거 같던데 여기 병원까지 헛걸음할 루오를 떠올리니 금세 마음이 짠해졌다. 사촌을 만난 걸 엄청나게 좋아하던 루오인데. 그 해맑게 웃던 얼굴을 모른 척하기 어렵다. 핸드폰 번호라도 알아둘걸. 수민은 지난밤 매니저 연석에게 명함을 받은 게 생각났다. 그걸 어디에 뒀더라? 병실에 들어와서 제대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받았는데……. 아! 맞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오른쪽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게 생각났다. 수민은 물기 있는 바지 주머니 속을 뒤졌다. 두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잡아당기는데 역시나 물을 먹은 종이가 뜯겨 나왔다. 수민은 조심스럽게 나머지 종이도 꺼냈다. 빨래하기 전에 옷 주머니를 확인하라는 엄마 잔소리를 수십 번은 들었는데, 미안 엄마 전혀 효과가 없었어. 엄마 딸은 구제 불능이야. 수민이 중얼거렸다.
물에 불리고 수민의 손길에 해어진 명함은 몇몇 글자가 날아가 버렸다. 전화번호도 절반은 비벼져 날아갔다. 다만 회사 이름은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말 불행히도 수민은 한글을 거의 읽지 못했다. 스웨덴에서 한글은 쓸모가 없었기에 수민의 한글 실력은 한국을 떠났던 다섯 살 나이에서 머물렀다. 그래도 쓰는 거 보다 읽는 게 좀 낫다. 수민은 떠듬떠듬 한 글자씩 눈에 새기며 읽었다.
카시아 엔터0인00. 서울00시 0남구 000 443
실제로 수민이 아는 글자는 몇 글자 없지만 ‘카시아’라는 이름은 정확했다. 다행히 받침이 없는 글자였다. 수민은 수첩을 꺼내 젖은 명함을 소중히 넣었다. 밖에 나가면 한국인이 가득하니 도움을 구하면 될 일이다.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게 두 번째다. 어젯밤 응급실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수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발목은 시큰거렸지만, 최대한 절뚝거리지 않으려고 다른 쪽 발에 힘을 줬다. 다리보다도 젖어서 뻣뻣한 바지가 더 불편했다. 한 층씩 내려갈 때마다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이 늘어났다. 수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젯밤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있는 홍보물을 훑어보니 관절이며 노인들이 모델인 사진 정보가 빼곡하다. 명원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는 노인전문병원이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요.
‘노인전문병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빠르게 와 닿지 않았다. 지난밤, 명원의 말에 수민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머릿속으로는 한 단어씩 곱씹었다. 명원의 서늘한 검은 눈동자가 수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열기를 띠고 있는 루오와 다른, 그리고 다정한 장난기가 넘치는 현우와도 다른, 사람의 마음 껍질을 하나씩 벗기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 사람은 평생 훔쳐보거나 힐끔거린 적도 없을 거야. 늘 똑바로 상대를 바라볼걸.
그래서 믿을 수 있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팀의 리더라더니 루오도 명원을 믿고 의지하는 게 보였다.
로비에 내리자 대기실과 접수실에는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흰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이 안전하게 보인다. 수민은 좀 더 편해진 마음으로 출구를 향해 걸었다.
× × ×
루오가 이상한데? 멤버들은 땀을 뚝뚝 흘리는 루오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평소에도 연습은 열심히 하던 녀석이지만 오늘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독려하며 몰아붙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노려보며 정시에 연습을 끝내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것만으로도 이상한데 제일로 이상한 건 오늘은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는 거다.
“명원아. 쟤 왜 저래?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혁민의 질문에 명원은 수민을 떠올렸다. 침착하게 그를 응시하던 눈동자와 투명하게 빛나던 하얀 피부. 루오와 똑같이 긴 속눈썹에 맺힌 작은 물방울.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의 윤기. 푸르스레한 새벽 속에 마주한 수민은 눈의 여왕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갖다 댄 건 그래서였다. 혹시, 얼어있다가 지금 녹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이 아니어서 루오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푸른 줄무늬가 있는 병원복이 드레스인 듯 착각이 들었다. 그런 수민 옆에서 만난 루오는 불과 몇 시간 전과 달라져 있었다. 돋보기로 태양 빛을 모아 불을 피워올 리는 것처럼 루오의 관심은 하나에 집중되었다. 루오는 회사로 돌아오던 길 내내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다.
“형. 수민이 예쁘지?”
“너랑 똑같이 생긴 얼굴을 보고 예쁘다고? 그리고 그걸 나한테 동의를 구한다고? 지금?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냐?”
“수민이는 사람을 만나러 한국에 왔어. 한국 기억은 거의 없대. 그런데 나는 기억이 난대. 우리가 같이 먹었던 짜장면, 손잡고 뛰어다녔던 놀이터. 이런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러네? 내가 걔한테 특별했던 거지. 핏줄이란 이런 걸까? 보자마자 당기는 게 있어. 확실히 쌍둥이라서 더 그런가?”
“너희는 사촌이야.”
“쌍둥이나 마찬가지야. 우린 부모님을 공유하고 있거든. 만약 수민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였을 거야.”
“확대해석이 이런 거군. 두 사람,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어.”
“그런 건 그냥 아는 거지. 형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 너무 무덤덤해. 참, 수민이에게 우리 영상이랑 이것저것 보여줬어. 특히 내가 멋지게 나온 거 위주로. 걔가 깜짝 놀라더라. 나보고 얼굴이 새빨개졌어.”
그때 수민의 얼굴이 생각났는지 루오는 킥킥 웃었다. 루오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부끄러운가 봐. 영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동자가 떼구루루 굴러가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 형, ”
귀엽다고? 어디가? 병원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수민은 독립적이고 당당하며 비밀스러웠다. 흥분한 강아지처럼 날뛰는 루오와 동갑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명원은 둘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루오가 키가 더 컸고 몸집이 더 컸다. 아무래도 수민의 몸 선은 더 부드럽고 나긋했다. 루오는 거침없이 수민에게 달려드는 반면 수민은 반가움과 경계심이 같이 섞여 있었다. 루오는 수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수민은 자주 먼 곳을 바라봤다.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처럼.
명원은 어깨를 움직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거울 앞에서 반복 연습 중인 루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이 꿈틀거렸다. 명원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입술을 꾹 눌렀다.
“형. 막내가 애쓰는 데 따라줍시다. 정시에 끝내보자고요.”
명원은 혁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혁민이 무엇을 궁금해하는 줄 안다. ‘어제 강남 일대 팬들을 집결시켰던 사건의 주인공은 루오의 사촌이 맞고, 다친 그 여자를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멤버들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루오의 지금 모습을 보면 그 이면에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게 분명했다. 20대 초반 남자들의 머릿속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해답이란 건 이런 것뿐이다.
“루오 사촌이 엄청 이뻐? 그래서 루오 쟤가 미쳐서 저래?”
“형. 루오랑 똑같이 생겼다니까. 사진 봤잖아요.”
“루오랑 똑같이 생겼으면 예쁘겠네.”
“형! 쓸데없는 소리.”
혁민이 히죽 웃었다.
“너 기분 안 이상했어? 저번에 루오랑 열애설도 났는데. 그때 네가 인터뷰에서 그랬잖아. ‘물론 우리 막내가 잘생기고 예쁘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남자보다 여자를 훨씬 좋아합니다. 루오가 여자가 되면 생각해 볼게요”
혁민은 명원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명원은 그 말을 무시했다.
“잡담 그만. 연습 재개합시다”
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룻바닥에 운동화 고무 밑창이 마찰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땀이 한번 식었던 몸은 금세 다시 달아올랐다. 멤버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명원은 흘러내리는 땀을 내버려 두고 왼발로 바닥을 힘차게 굴렀다. 모두가 발을 맞춰 왼발을 공중에 띄워 몸의 축을 비틀었다. 쿵 소리가 나더니 몸이 훌쩍 날았다. 곧이어 오른발로 안전하게 바닥을 디디자 명원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정면 거울을 통해 연습실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로드 매니저로 일하는 정훈이 들어왔다. 그는 핸드폰을 꼭 쥐고 문 앞에 서서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규호가 오디오를 끄는 사이 명원은 헐떡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명원씨. 집에서 전화가 와서요.”
“우리 집이요? 왜요?”
“급한 일이래요. 전화 통화 좀 하자고 하시는데.”
정훈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명원은 숨을 고르며 핸드폰에서 엄마인 문영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기다리고 있었던지 문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얘. 아들!”
“엄마. 무슨 일,”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문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쩌지? 루오 사촌이 사라졌어.”
× × ×
병원을 나오자마자 수민은 바로 옆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거기서 마스크와 발목 보호대를 구매했다. 그리고 한 10미터쯤 걸어가니 옷가게가 보였다. 거기에서는 후드집업을 샀다. 어젯밤 루오가 얼굴을 가렸던 방식 그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수민은 마스크를 쓰고 집업을 입고서 후드를 둘러썼다. 확실히 캡 모자 하나만 쓴 거보다 더 가려주는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할 일은 지도가 되어 줄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서 수민은 신중하게 한 남자를 선택했다. 그는 적당히 젊고 적당히 친절해 보였다. 수민은 일부러 영어를 사용했다. 외국인이라는 걸 어필해 친절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남자는 친절을 넘어서 감동적이었다. 수민이 남자에게 물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강원도로 가는 버스는 어디에서 타는가? 였고 다른 하나는 카시오라는 회사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 였다.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그 회사가 있어요. 가는 길이니 들르면 되겠네요.”
수민이 내민 두 동강 난 명함을 유심히 보던 남자는 카시오 엔터테인먼트를 잘 아는 눈치였다. 루오가 자기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더니 진짜였다. 남자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가는 길을 검색해서 118번 버스를 타고 32개의 정류장을 지나서 내리라고 알려주었다. 갈아타면 좀 더 빠르겠지만 수민은 최대한 한 번에 가는 길을 원했다. 발목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회사 앞까지 가는 일은 쉬웠다. 버스에서는 정류장마다 안내가 친절하게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수민에게 무관심했다. 어젯밤 같은 일이 일어난 게 믿지 않을 만큼. 현우에게 이야기해 주면 뭐라고 할까? 아마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생했네, 하고 달래줄 것이다. 아니면 크게 안아줄지도 모른다. 현우는 언제나 수민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Dear 수민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비행기를 예매하고 싶어. 우리가 보낸 시간은 짧지만 충실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많이 부족해. 나는 좀 더 거기에 머물러야 했어. 너에게 나를 더 보여줘야 했어. 사랑하는 우리가 불안정하게 부유하는 책임을 내가 좀 더 짊어져야 했어.
현우가 보낸 첫 번째 메일에는 온통 걱정뿐이었다. 비행기로 열 다섯 시간 넘게 떨어진 어린 연인의 불안을 끝없이 염려했다. 그러나 현우는 자주 까먹는다. 수민은 손바닥보다 작은 홀드에도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클라이밍 선수라는 것을. 발아래가 절벽이어도 수민은 매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현우를 놓을 가능성은 없었다.
버스는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목적지에 닿았다. 수민은 다친 왼발에 주의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거리에는 아무 특색이 없는 빌딩들이 가로수처럼 이어져 있다. 수민은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눈에 띄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간판들 뿐. 수민은 주위를 둘러보다 일단 먼저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길을 묻기 전에 물을 좀 마시고 싶었다. 편의점 벽에 있는 냉장고로 가 생수 한 병을 꺼내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왜 나왔어?”
돌아보니 금발 머리를 한 낯선 남자였다. 그는 머리 스타일에 어울리는 빈티지 청바지에 허리에는 은색 체인이 달랑거리고 구멍이 난 티셔츠 두 장을 겹쳐 입었다. 남자의 팔목에는 가죽끈으로 칭칭 동여맨 듯한 팔찌와 비싸 보이는 은색 시계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이건 90년대 유행하는 록 밴드 스타일로 봐선 남자는 누가 봐도 음악 하는 사람이었다. 수민은 쉽사리 이 남자가 카시오 어쩌고 하는 회사의 관계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회사 근처에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몰라? 너희 매니저는 물도 준비 안 해놨대? 그건 아주 기본적인 건데. 매니저 새로 왔어? 초짜야? 왜 네가 물을 사러 와?”
또다. 또 루오로 오해받는 상황인 게 분명했다. 수민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는요.”
“이게 누구야? 루오? 강연석 실장은 아티스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번엔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요새는 애들이 문제인 거야? 아니면 회사가 문제인 거야? 혼자 나가겠다고 해도 따라붙어야지. 예전에 내가 로드 뛸 때는 똥 싸는 데까지 따라갔다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금발 머리 남자가 난감하게 수민을 한번 보고 중년 남자를 한번 보더니 달래듯 말했다.
“루오가 팀 생각해서 솔선수범해서 물 사러 나온 건데 너무 뭐라 그러지 마세요. 얘가 막내니까 형들 모시느라 그러는 거지. 하는 짓이 예쁘잖아요.”
“이 바닥이 어디 그래? 선의로 하는 행동이 다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거 알잖아. 아무튼, 빨리 들어가. 팬들 들이닥칠까 겁나네. 어제도 루오 때문에 한바탕 난리였는데 오늘 또 이렇게 부주의하게 나오는 거 보면 참….”
“맞다. 어제 루오 닮은 사람 때문에 팬들이 뒤집어졌죠.”
“어디서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닮은 꼴이라고 관심받는 거 보면 웃긴다니까.”
그 사람이 접니다. 수민은 이 말을 꾹 삼켰다. 중년 남자의 짜증이 피부로 느껴졌다. 중년 남자의 어조가 사나워 자신이라는 걸 밝혔다가 무슨 사달이 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수민이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금발 머리 남자는 수민의 손에 들린 물을 재빨리 제자리에 돌려놓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자. 물은 도훈이 시킬게.”
이대로 따라가도 되는 거야? 어쩌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은 남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 × ×
명원은 엄마의 전화를 끊으며 루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보았다. 루오는 한 손에는 물병을 들고 마치 명원을 뚫을 듯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루오네 엄마랑 오늘 통화하시면서 네 사촌 이야기를 하신 모양이야. 깜짝 놀라면서 당장 병원으로 가신다고 하셨나 봐. 그 이야기를 수민 씨한테 했는데 그 길로 사라졌대.”
“아씨. 왜!!!”
루오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멤버들이 놀래서 루오를 쳐다봤다. 명원은 침착하게 루오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루오의 피부가 뜨거웠다.
“진정해. 너, 수민 씨한테 말 들은 거 없어? 원래 오늘 떠나야 한다던가, 아니면 누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던가.”
“아니야. 씨이... 걔는 우리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 그러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라고. 일단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난 다음, 그때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랬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병원에 해놨어야 하는 건데. 씨이... 미치겠네…. 까먹었어!”
어느새 루오의 눈가가 벌게졌다.
“야. 이루오. 울어? 운다고 지금? 스무 살 성인 남자가 이런 일로 운다고?”
깜짝 놀란 규호가 휴지를 들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루오가 휴지를 받아들고 대충 눈 주위를 문질렀다. 멤버들은 대충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챈 듯 모여들었다. 루오는 코를 팽 풀더니 휴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너 설마?”
“찾으러 가야지.”
“뭐?”
이번엔 혁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찾아야지. 걔 지금 한국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어. 오직 나뿐이야. 내가 실수해서 갑자기 병원에서 나가게 된
거잖아. 나 때문에 다쳤고 나 때문에 병원에서 나가고. 다 나 때문인데 이대로 모른 척하고 있을 순 없어. 찾아서 데리고 와야지. 걔 아직도 발목 아프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디로 간 줄 알고 찾으러 가?”
“강원도 간다고 그랬거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을 거야. 거기 가면 찾을 수 있어.”
“미쳤냐? 사람들 뚫고 퍽이나 찾으러 다니겠다.”
“가리면 되지.”
“그래도 티가 나거든. 다 알면서 왜 그래?”
루오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던져놓았던 가방과 옷을 챙겼다. 혁민이 다다다 달려가 루오를 잡았다.
“안돼. 가면 안 돼.”
“갈 거야.”
“안된다고!”
“갈 거야!”
이번엔 고우랑 호키가 달려가 루오를 잡았다. 장정 셋이 달라붙었는데도 루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차했다간 가방과 옷을 던져버리고 몸만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루오는 올가미를 앞에 둔 들개처럼 사력을 다해 버둥거렸다. 양다리와 팔을 잡힌 루오는 쓰러져서 버둥거리다 출입구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루오의 팔을 잡고 늘어지던 혁민이 명원을 향해 소리쳤다.
“야. 리더!! 어떻게 좀 해 봐!”
명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고민하다 결정했다.
“탈의실에 집어넣어요.”
연습실에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작은 탈의실이 딸려 있었다. 창문도 없고 집기류도 없는 공간으로 땀내 나는 연습복을 갈아입는 용도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명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카엘과 규호까지 붙어서 루오를 번쩍 들어서 연습실 안으로 던졌다. 그리고 문을 닫으며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곧 문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연습실 안에서 루오가 문을 걷어차는 소리였다.
“야. 이 자식아!! 진정하고 머리 좀 식혀. 지금처럼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 안 나.”
혁민이 안을 향해서 소리쳤다. 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차는 소리, 문 열라고 지르는 고함 소리, 문고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연습실은 짐승의 소리로 가득 찼다. 명원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애가 따로 없다. 감정표현이 솔직하다 못해 심리치료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후드집업을 입은 매우 익숙한 소년이 주춤거리며 들어섰다. 들어오고 싶지 않지만 어떤 힘에 밀려 떠밀려온 것 같았다. 명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수민이었다. 루오와 닮은 속눈썹이 촘촘한 크고 진한 눈이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명원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금발 머리가 문 사이로 쑥 고개만 내밀었기 때문이다. DA튜더인 정진이었다.
“야, 현치용 이사님이 경고하는데 루오 혼자 내보내지 말래. 아무리 요 앞 편의점에 물 사러 가는 거라고 해도 얘를 혼자 내보내? 강연석 실장님이나 로드 매니저한테 말하면 되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다시 연습실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정진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문을 좀 더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소리야?”
그 순간, 명원은 재빠르게 혁민에게 눈짓했다. 지난 몇 년간 팀으로 쌓아온 힘에 의지하며. 혁민이 고개를 까딱하는 것을 보고서 명원은 교묘하게 정진의 시야를 가리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혁민은 연습실 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이 연습실 문 쪽을 가리며 섰다.
명원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수민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겨 어깨를 안았다. 평소 루오에게 그러듯 친밀하게 서슴없는 태도였다.
“혁민 형이 동작이 잘 안된다고 문에 화풀이하는 소리예요. 놔두세요. 부서지면 혁민 형이 고쳐놓는다니까.”
“어이구. 성질머리하고는.”
정진이 혀를 찼다. 명원은 씩 웃으며 한 손으로 수민의 머리통을 잡고 마사지하듯 주물럭거렸다.
“막내도 잘 보호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