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보니
수민은 남자가 어색하지 않았다. 스웨덴에서는 데이트, 키스, 섹스 이런 건 10대 시절에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고 수민처럼 운동을 하다보면 서로 어울려 뒹굴기 일쑤여서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익숙했다. 집에서는 어떤가. 매일 수호가 웃통을 벗어제끼고 근육 키운다며 덤벨을 끌어안고 살고 수호의 친구들은 다 우락부락한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며 집 옆에 있는 가구 공장에는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는 직원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수민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명원의 손이 수민의 머리통을 감싸자 느껴지는 그 따뜻하고 요상한 온기 때문에.
“수민아.”
정진이 나가고 그들만 남게 되자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루오가 뛰어나왔다. 안에서 혁민과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루오는 옆에 있는 명원을 밀치고 수민을 꽉 끌어안았다. 이 갑작스런 애정에 수민이 쓰고 있던 후드모자가 벗겨지고 몸이 뒤로 밀렸다. 수민은 놀랬지만 이내 루오의 등을 토닥였다.
“저기, 사촌. 숨막히는데.”
어제부터 생각했지만 이 동갑내기 사촌은 막무가내인데가 있다. 뿔로 사방을 들이받으며 계곡을 뛰어 오르는 한 마리의 양을 떠올리게 한다. 수민은 힘을 줘서 루오의 팔을 끌어내렸다. 그러자 이번엔 두 손으로 수민의 두 볼을 움켜쥐었다.
“뭐야.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너 열 나?”
수민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명원이 무뚝뚝하게 끼어들었다.
“루오 네가 숨도 못 쉬게 끌어 안아놓고 무슨 소리야? 목 부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했네.”
그 말이 들은 건지 루오가 좀 더 느슨하게 수민을 끌어 안았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야? 아니, 일단 미안해. 내가 병원에 말해놨어야 했는데 까먹었어. 그래서 엄마한테 연락이 간 거야.”
“아니.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수민은 당황스러웠다. 얘는 자기랑 나랑 어제까지 완전 낯선 타인이었다는 자각이 없나봐. 왜 이렇게 들러 붙는거야? 한국에서는 사촌들끼리 이 정도 스킨십은 하는 건가? 수민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 사이 명원이 루오를 잡고 떼어냈다.
“적당히 해라. 이산가족이야?”
“그래. 적당히 해. 우리도 인사 좀 하자. 루오와 똑같이 생긴 루오 사촌. 와. 진짜 닮았네. 둘이 서 있는데 도플갱어 보는 줄.”
멤버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눈에 호기심과 경탄이 가득했다. 수민은 턱 아래로 밀려 내려간 마스크를 벗었다. 긴장과 더위에 수민의 코 끝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루오가 싱긋이 웃으며 자기 티셔츠 소매를 잡아당겨 땀을 닦아 주었다. 지나치게 친밀한 행위에 형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래도 되는 건가? 명원이 한숨을 내쉬더니 루오의 뒷통수를 툭 쳤다.
“정신차려. 가서 의자나 들고 와.”
헤헤 웃으며 루오가 잽싸게 연습실 구석에 있는 의자를 들고 왔다. 그 사이 명원이 수민이 메고 있던 가방을 잡았다.
“가방 줘요.”
수민이 돌아보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수민의 눈에 명원은 조금 피곤해보였다. 명원이 가방을 가져가며 말했다.
“힘들어 보이네요.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나봐요.”
명원의 눈에도 수민이 똑같이 보인 모양이다. 수민은 고개를 흔들고 루오가 가져온 의자를 붙잡았다.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건 사실이었다. 긴장 때문에 피가 빨리 돌아서 그런지 어제 다친 발목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집스레 앉지 않았다. 이 공간, 이 상황이 불편했다.
“어제 같이 오신 분이 주신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번호가 날라가서. 가는 길에 들렀어요. 루오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겉아서.”
“그래서 이 밑에서 정진이 형을 만난 거고?”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원은 수민의 가방을 의자 발치에 놓고 구석으로 가 물을 집어들었다. 그 사이 의자 주위로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진짜 루오 사촌이에요? 나 아까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분명 루오는 탈의실에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뿅하고 나타나니까.”
“안녕하세요. 전 규호입니다. 아니다. 우리 나란히 서서 인사할까? 한 명씩 하면 시간 걸리는데.”
“나는 원래 아는 사이 같아. 루오 여자 버전은 이렇구나. 별로 다를 게 없어!”
“어제 엄청 놀랬다면서요? 스웨덴에는 우리 잘 모르죠? 우리 인기가 거기까진 안닿았나봐.”
“루오가 조금 더 크네. 루오 턱이 조금 더 각이 졌나? 울대는? 울대 한번 봐봐.”
“형들, 두 발자국씩 떨어져요. 수민이 숨 막히겠네.”
“그런데 왜 사촌이라고 말을 안 해? 그냥 말하면 안되는 거야?”
어제 루오가 대충 설명을 해줬던 사람들인데 한꺼번에 덤비니 정신이 없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인사와 질문 중에서 마지막 혁민의 목소리만 간신히 들었다. 수민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럴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렀어요. 루오에게 인사하고 가려고 온건데. 제가 스웨덴에는 아무 말도 안하고 몰래 한국에 왔거든요. 그래서 공식적으로 다니기가 좀 그래요.”
“스웨덴 이모는 모른다고?”
수민에게 이 말을 처음 들은 루오가 놀라며 되물었다. 어젯 밤에 대충 얼버무렸는데... 수민은 이젠 더 감출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엄마랑 아빠는 아직도 모르실걸. 수호도 몰라. 내가 친구 집에 있는 줄 알 거야.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어서 핸드폰도 꺼놨어. 핸드폰이 켜져 있으면 해외 나갔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만약 이모가 연락을 했다면 이제는 아시겠지.”
물을 마시고 있던 명원이 다가왔다. 의아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수민은 망설였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했다가 수호와 똑같은 반응을 할지도 모른다. 아직 어리고, 너는 세상을 모르고, 너는 속은 거고, 그 남자는 나쁜 놈이고. 지금 수민이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그거였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들었는데.”
명원이 덧붙였다. 수민이 루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말했냐, 그 뜻이다. 루오가 뜨끔한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수민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보기 좋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들 눈에도 내가 무모해 보이겠지? 같이 지낸 건 영국에서 일주일, 스웨덴에서 한 달뿐인 남자를 찾아 이 먼 곳까지 혼자 오다니. 시간과 마음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고, 현우가 보여준 사랑은 가짜가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다 필요없다. 믿는 건 나 하나면 된다. 내가 누구의 동의를 구해야 할까.
“인사 했으니까 나 갈게요.”
가방을 집어 들며 수민이 말했다. 명원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갑작스런 작별인사에 멤버들이 당황한 사이 루오만이 “안돼!”하고 수민의 손목을 잡았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간다 그래? 우선 밥이라도 먹자. 배 안 고파? 병원 밥 맛없었잖아. 너 거의 먹지도 않던데.”
“충분히 맛있었어. 이제는 가야지.”
“명원이 형이 캐물어서 그래. 형, 진짜 왜 그러냐?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건데. 하여간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
불똥이 명원에게로 튀었다. 명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하,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루오가 명원을 째려보자 멤버들이 왜들 그러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수민은 다시 마스크를 끼고 후드를 썼다. 그리고 루오의 손을 잡고 다독거렸다.
“고마웠어. 사촌.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땐 이모랑 이모부랑 다 만날게.”
“야!”
“내 걱정 하지마.”
수민이 가방을 드는데 명원이 다가와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뭐지?
“이 건물 나가는 길은 알아요? 그리고 아무 일 없이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마스크랑 모자 쓰면 못 알아보던데....”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지금 여기 있는 겁니까? 강원도 사람들은 루오 모른대요? 거기도 한국이에요. 어제 당한 일에서 느낀 거 없어요? 한국에선 이 얼굴로 그냥 돌아다니면 한 시간도 안돼서 SNS에 다 떠요.”
오. 논리적인데? 명원이 말하니 진짜 그럴 거 같다. 그런데 태도가 사람 마음을 긁는다. 수민은 그 말이 맞다는 걸 알지만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싶었다. 이건 수호가 ‘불뚝심’이라고 학을 떼는 수민의 못된 습성이었다. 평소라면 ‘엿 먹어!’라고 외치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 수민의 눈에 살짝 열기가 돌았다. 루오는 단순하기라도 하지, 저 로직(logic)맨은 대놓고 어렵다.
참자. 여긴 한국이고 명원은 고마운 사람이니까.
“가발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나 스웨덴 있을 땐 루오 닮았단 말 한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가발 쓰고 치마 입고 그러면 될 거 같은데.”
수민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기다렸다는 듯 명원은 빙긋 웃더니 수민에게서 가방을 낚아챘다.
“가발이랑 옷 살 돈 없죠? 우리가 구해 줄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연습실 안 소파쪽으로 걸어가는 명원을 보며 수민은 생각했다. 어라? 이건 진 건가, 아닌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