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첫사랑

by 브리

장면 1 등교



3월 아직 추운 푸른 빛 새벽. 4차선 대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들.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 학교에 가는 학생들. 잎아 다 떨어진, 커다란 플라터너스 나무 아래로 한 소녀가 걸어온다. 소녀의 이름은 문영. 귀 밑 3Cm를 준수한 단발머리, 무릎 중반까지 오는 긴 교복치마, 아직 새것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가튼 검은 가방. 이제 고등학교 1학년생인 문영은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문영은 학교에 가기 위해 통학 미니 밴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가 타는 곳인지 확실하지 않아 불안하다.


-문영 (중얼기리는) 엄마한테 같이 나와 달라고 할 껄 그랬나?


그떄, 문영이 왔던 쪽에서 소년이 걸어온다. 훌쩍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 그에 비해 대충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 짧은 스포츠 머리지만 꽤나 신경쓴 것 같은 앞머리. 소년의 이름은 현진이다. 현진은 느릿느릿 걸어서 문영의 옆에 와 선다. 현진 역시 통학 미니밴을 타러 왔다. 문영이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본다.


-문영 (현진 보고서, 알아본다. 흠칫 놀란다)

-현진 (문영의 시선을 느끼고 마주 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같은 색 교복이다.


-현진 (꽤 친밀하게)고진여고?

-문영 (고개 끄덕인다)

-현진 그랬구나. 노란색 미니밴?

-문영 응.

-현진 같은 차네. 나는 고진고. 우리 같은 학교 다니게 됐구나?

-문영 (새침하게)정확히 말하면 같은 재단 학교지. 넌 남고고 난 여고니까.

-현진 담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데 거의 같은 학교지. (문영 보고, 툭 내뱉는) 잘 지내보자.

-문영 (얼굴이 살포시 붉어진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그래.


멀리서 노란색 미니밴 한대가 정차하려고 속력을 줄이며 다가온다. 둘 앞에 서자 자동문이 열린다. 안에 둘 또래 학생들 몇몇이 이미 타고 있다. 문영이 먼저 탄다. 먼저 타고 있던 보민이 손을 번쩍 들고 문영을 반긴다.


-보민 문영아! 여기!


문영이 밝게 웃으며 보민 옆으로 가고, 현진은 뒤쪽 자리로 들어가 앉는다.


-보민 (고개를 뒤로 돌려 현진 본다. 눈이 반짝거린다.) 문영아. 너 쟤랑 같이 타?

-문영 (가방을 무릎위에 올리고 치마를 정리하면서 아무렇게나) 응?

-보민 방학동안 같이 학원다녔던 걔 맞지? 수학 정석 반?

-문영 그럴껄?

-보민 고진고구나. 같은 학교네.

-문영 (똑같은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어 본다) 무슨 같은 학교야?

-보민 옆에 붙어 있으니까 같은 학교지. 겨우 담하나 사이인데. 우리 학교 다니는 다른 여자애한테 들었는데 우리학교랑 고진고랑 커플이 많은데 커플들이 점심시간이 되면 그 담벼락에 다닥다닥 붙어있대. 담을 사이에 놓고 그렇게 애절하대.

-문영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아니 견우와 직녀인가?

-보민 (어깨 으쓱한다. 다시 현진쪽을 힐끔 본다. ) 학교가 머니까 이런 건 좋네. 매일 아침 얼굴 보고 인사 하고. (문영보며)학교까지 차타고 40분 가야 하는데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문영 (의아하게 ) 이게 즐거워?

-보민 나쁠게 있나?

-문영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싱긋 웃으며) 없지.


두 소녀가 함께 돌아본다. 현진은 창밖을 보고 있다.


장면 2 하교 (아침 그 장소)



어둑어둑한 저녁. 노란 밴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차문이 열리면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수다소리가 들리고 곧 문영과 현진이 내린다. 문영 내리자 마자 몸을 돌려 차를 보며 손을 흔든다. 현진은 앞서 걷기 시작한다. 문영이 현진보다 다섯걸음 뒤에서 걷기 시작한다. 둘은 아파트로 들어가는 곁문으로 들어간다.


아파트 안


조도가 낮은 가로등이 켜져 있다. 현진과 문영은 천천히 걷는다. 앞에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현진이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철봉에 매달려 풀업을 한다. 문영은 이건 또 뭔가 싶어 본다.


-문영 (물끄러미 보면서 걷다 철봉 옆을 지나갈때 멈춰 선다)

-현진 (철봉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는데)

-문영 뭐해?

-현진 (철봉위로 기를 쓰고 올라가며) 운동하잖아.

-문영 달밤에?

-현진 (철봉에 턱을 걸고 숨 가쁘게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지금 말고 운동할 시간이 있냐?

-문영 (맞는 말이다.) 그럼 열심히 해. (말하고 지나가려는데)

-현진 (철봉에 매달린 채로) 야!

-문영 (돌아보면)

-현진 (매달려서 씩 웃으며) 잘 자라.

-문영 너도 ( 하면서 돌아서는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장면 3 등하교길



비슷한 아침. 플라터너스 나무에 새싹이 돋아 있다. 미니 밴을 기다리는 문영과 하품을 하며 걸어오는 현진. 멀리 노란 미니밴이 오는게 보인다. 문영이 돌아보며 현진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시간 경과)

플라터너스 나무에 잎이 제법 푸르다. 현진이 교복 재킷은 벗은 셔츠만 입고 서 있다. 문영이 곁문에서 허둥지둥 뛰어 온다. 문영의 옷차림도 현진과 비슷하다. 한 손에는 양말, 한 손에는 사과 하나를 들고 뛴다. 현진, 보면서 픽 웃는다.


-현진 이 와중에 지 먹을건 챙겼네.


(시간 경과)

플라터너스 나무에 잎이 무성하다. 여름에 가까운 날씨. 현진의 가방에 커다란 물통이 들어 있는게 보인다. 문영의 머리가 조금 길었다. 둘이 차가 오는 방향으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에서 무언가가 문영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진다. 문영 응? 하고 손이 머리 위로 가는데, 현진이 잽싸게 손목을 잡는다.


-문영 (당황해서) 뭐야? 뭐? 왜?

-현진 안 만지는게 좋을 걸.

-문영 (눈이 커다래진다) 뭔데?

-현진 (담담하게)엄청 큰 애벌레.

-문영 (흡, 하고 숨을 들이쉬며 눈을 질끈 감는다. 파르르 떤다. 놀래서 굳었다)

-현진 처리해줘?

-문영 (간신히) 부탁해.

-현진 (주위를 둘러보고 주머니를 뒤적거리지만 딱히 도구를 찾을 수 없다. 어쩔수 없지. 문영에게 바싹 다가선다) 가만히 있어.

-문영 (정수리에서 뭐가 꼼지락거리는 듯한 느낌에 온 몸이 긴장중이라 현진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현진 (손으로 조심스럽게 애벌레를 잡는다)

-문영 (눈은 꼭 감은 채) 됐어? 잡았어?

-현진 (벌레는 잡았지만 문영을 더 놀리고 싶다. 그래서 자기 손바닥위에 벌레를 올리고 문영의 눈 앞에 댄다) 어. 잡았어. 눈 떠.

-문영 (한숨 쉬며 눈을 뜨는데, 눈 앞에 있는 벌레. 잠시 정적 . 그리고 바로 비명을 지른다) 꺄악! (현진의 손을 탁 밀쳐버린다)

-현진 (킥킥대며 웃는다)


장면 4. 학교


점심시간, 문영이 교실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본다. 고개를 조금 더 내밀면 옆에 있는 남고 운동장도 보인다. 두 학교를 가로지르는 담도 보인다. 거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이들도 보인다. 보민이 다가온다.


-보민 (운동장을 보며) 오늘도 매미들이 붙어 있구나.

-문영 (말없이 웃는다)

-보민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3반에 은주 있지? 걔가 지 남친이랑 저기서 쪽지를 던지고 놀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혼났대. 글쎄 걔가 바보같이 받은 쪽지를 담 아래 다 버려두고 가서 걸렸단다. (창밖으로 한참 보다가 손들고 가리키며) 어! 저기, 차현진 아니야? 축구 하나 봐.

-문영 (그 소리에 고개 빼서 보는데)

-보민 (눈 가늘게 뜨고 ) 맞네. 키 크고 말랐고.

-문영 (보지만 모르겠다) 그게 보여? 개미보다 작은데?

-보민 (문영 보며) 눈 나쁘네. 가서 안경 맞춰. (갑자기 생각 난 듯) 참. 이오공감 앨범 빌려줄래?

-문영 (고개 끄덕이며) 응. 근데 집에 있어. 내일 가져올게.

-보민 그럼 나중에 너희 집에 같이 가서 받아 가도 돼? 빨리 듣고 싶어.

-문영 그래.


보민이 계속 운동장을 본다. 문영은 그런 보민을 바라본다.


장면 5 학교 앞 하교길


노란 미니밴이 서 있다. 양쪽 교문에서 학생들이 쏟아져나온다. 그 중 문영과 보민이 섞여 있다. 둘이 사이좋게 차에 오른다. 같이 통학하는 학생들도 타기 시작한다. 현진이 마지막쯤에 차에 오른다. 현진이 앞에 같이 앉은 두 소녀를 힐끗 본다.


장면 6 늘 내리던 장소


저녁. 미니 밴이 다가온다. 문이 열리고 문영과 보민이 먼저 내린다. 뒤이어 현진이 내린다. 차가 떠나고 보민이 현진과 문영을 보며 말을 건넨다.


-보민 (활기차게 웃으며) 늘 내리던 데서 안 내리니까 기분이 이상해. 고작 한 정거장 차이인데.

-문영 나도 너랑 집에 같이 가니까 좀 이상해.

-보민 (문영의 팔짱 끼며) 내가 이사 가기 전에는 매일 함께 갔는데. 옛날 생각난다.

-

현진, 잠깐 보다가 먼저 휙 걸어간다. 보민이 냅다 부른다.


-보민 (소리지르는)야. 차현진. 같이 가!


보민이 문영을 끌고 거의 뛰듯이 걷는다.


장면 7 아파트 안


세 명의 소년, 소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 보민은 자기 가방을 벗어 현진에게 던진고 현진이 받아서 다시 문영에게 던지면 문영은 그걸 살짝 피한다. 보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발을 구르고 문영과 현진이 웃어댄다. 전반적으로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


장면 8 문영, 현진의 집 앞


5층짜리 111동과 110동. 두 개의 동이 마주보고 있다. 문영과 보민은 111동 3-4라인 입구로 틀고 현진은 정확히 반대쪽에 있는 110동 3-4라인 입구쪽으로 들어간다. 한 층씩 올라갈때마다 계단에 불이 켜진다.


장면 9 문영의 집


보민이 4층과 5층 사이 계단참에 서서 창 밖을 보고 있다. 문영이 집에서 이오공감 앨범을 갖고 나온다.


-문영 (5층에서 내려오며) 자, 여기

-보민 (받으며) 고마워! 잘 듣고 돌려줄게. (다시 몸을 돌려 손으로 반대편 5층을 가리키며) 저기가 차현진네 집이야?

-문영 응.

-보민 그런 거 같더라. 금방 저 방에 불이 켜졌거든. 저기가 차현진 방인가 봐. 너희 집 베란다에서 보면 바로 보이겠다.

-문영 아마 그럴걸?

-보민 (몸을 돌려 문영 보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를 가방에 넣는다) 갈게. 내일 봐.

-문영 응. 잘 가. 조심해서 가.


보민이 계단을 내려간다. 문영은 물끄러미 뒷모습을 본다.


장면 10 문영의 집


늦은 저녁, 문영이 집에 돌아온다.


-문영 (인사하는) 다녀왔습니다.

환한 거실에는 아무도 업다. 문영이 자동으로 안방쪽으로 가는데 문이 열리며 부모님이 나온다. 외출하려는 듯 아래 위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엄마 (머리 매만지며) 이제 오니? 배고프지? 냉장고에 간식 있어. 꺼내 먹어. (하고 몸을 돌리면 뒤이어 나오던 아빠가 핸드백을 건네준다)

-문영 (이상해서 보는) 어디 가세요?

-아빠 대전 고모부 모친상 당하셨다 그러네. 엄마랑 갔다 올게.

-문영 (놀래서) 지금?

-엄마 지금 가서 조문하고 바로 오면 새벽에 집에 올거야. 아빠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남편 보고) 조의금 챙겼지?

-아빠 (양복 주머니 더듬더듬 확인하며) 응. 아까 넣었잖아.

-엄마 (문영 보고) 공부 좀 하다가 일찍 자!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문영 (입이 삐죽) 내가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언니는?

-엄마 과제하느라 학교에서 밤샌대.


(시간 경과)


문영, 목에 수건을 걸고 샤워하고 나온다. 머리 대충 털고 바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주스를 꺼낸다. 살짝 마시는데 너무 차갑다. 일단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혼자 있는 이 사간이 너무 좋아서 씨익 웃는다.


문영은 분위기를 좀 잡고 싶다. 거실의 불을 끄고 주방 불만 살려놓는다. 그리고 거실 오디오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튼다. 금세 분위기가 흥겨워진다. 한 손엔 주스 잔을 들고, 한 손엔 수건을 빙빙 돌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처음엔 들썩이다가 나중에는 움직임이 격해진다. 결국 주스 잔을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소파 위를 방방 뛰고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다. 스트레스 해소되는 짜릿한 기분.


노래가 ‘이 밤이 깊어가지만’으로 바뀌자 문영은 숨을 가쁘게 쉬며 따라놓은 주스를 시원하게 쭉 마신다. 금세 열이 올랐다. 문영은 바람을 쐬려고 베란다 쪽으로 나간다. 달이 떴나?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건너편에 둥근 사람 머리통이 보인다.


문영, 처음엔 저게 뭐지? 하고 보다가 점점 눈이 커진다. 반대편 5층. 저 집은 현진의 집이고, 저 창문은 현진의 방 창문이다. 그리고 그 창문에 한 사람이 창문턱에 기대어 문영의 집 쪽을 보고 있다.


-문영 (입을 틀어막고 쭈그리고 앉는다. 설마 봤나? 눈을 드니 어두운 거실이 보인다. 중얼거리는) 깜깜해서 못 봤겠지?


못 봤을거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생긴 문영이 다시 몸을 일으킨다. 현진의 방 쪽을 보는데


현진의 시선에서는 문영이 베란다 난간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현진, 씩 웃는다.


-현진 (손을 흔든다.)


문영의 집 베란다

-문영 (봤구나! 하는 꺠달음과 입이 딱 벌어지는데)


현진의 방

-현진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문영의 집 베란다

-문영 (얼굴이 새빨개지며 다시 주저앉는다)


현진의 방

-현진 (킥킥킥 웃는다)


장면 10 다음날 등굣길


현진이 먼저 와 차를 기다리고 있다. 문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와서 선다. 현진은 문영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문영은 작게 한숨을 쉰다.


장면 11 미니 밴 안


문영 옆에 앉아 있던 보민이 책가방을 뒤적이며 뭔가 찾는다.


-보민 (책을 하나씩 꺼내며) 큰일이네. 어쩌지?

-문영 왜?

-보민 (울상으로 문영 보며) 나 수학책 집에 놓고 왔나봐. 오늘 재용쌤 수업인데.

-문영 (놀라며)야. 어떻게 해. 재용쌤은 책 안갖고 오면 무조건 복도에 나가 서 있으라고 하는데.

-보민 (짜증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히잉.

-문영 딴 반에 가서 빌려보자.

-보민 응.


미니 밴이 학교 앞에 도착한다. 아이들이 짐을 챙겨 내리기 시작한다. 보민은 꺼내놓은 책을 다시 책가방에 집어 넣는다. 내리던 현진이 보민에게 책 하나를 툭 던지고 지나간다. 보면, 수학책이다. 보민이 눈을 들어 현진을 본다.


-보민 어! 차현진. 이거.


현진은 말없이 내린다.


-보민 (수학책을 들고 현진의 뒷모습을 본다)

-문영 (그런 두 사람을 복잡한 눈으로 본다)


장면 12 교실 안


문영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보민이 옆자리에 와 앉는다.


-보민 뭐 읽어?

-문영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준다) 좁은 문.

-보민 재밌어?

-문영 너도 볼래? 다 읽으면 빌려줄게.

-보민 (몸서리치며) 싫어!

-문영 (웃는다)

-보민 (문영을 보다가) 문영아.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토요일이잖아. 밤새 같이 수다 떨고 놀자.

-문영 엄마한테 물어볼게. 아마 된다고 하실거야.

-보민 (신나서) 그럼 바로 전화해줘야 해. 내가 네가 좋아하는 과자 준비해 놓을게.

-문영 그럼 나는 떡볶이 사갈게.

-보민 좋아!


장면 13 보민의 방


작은 밥상 위에 과자봉지와 음료수, 떡볶이가 널려있다. 편안한 옷차림의 문영과 보민이 나란히 배를 깔고 엎드려 잡지를 보며 수다를 떤다.


-보민 (손가락으로 잡지를 가리키며) 이 옷은 별로야. 이 배우랑 안 어울리는데 매번 이런 스타일로만 입더라.

-문영 (고개 끄덕이는) 다리가 짧아 보여.

-보민 그치? 이런 사람은 라인이 이렇게 들어간 옷을 입는게 더 좋아 (손으로 모양을 만들며 설명한다)

-문영 넌 나중에 의상학과 가면 딱이겠다.

-보민 너는 국문과 가고. 우리 같은 대학 가자.

-문영 될려나?

-보민 왜! 하면 된다 몰라?

-문영 (잡지로 눈을 돌리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어.

-보민 (그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말문이 막힌 느낌)

-문영 (말이 없자 보민을 보는데)

-보민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고 있다)

-문영 (보민을 보며) 왜?

-보민 (자신없고, 망설이다가) 나... 너한테 말할 거 있는데.

-문영 해.

-보민 (조심스럽게) 차현진이 고백했어. 나한테.

-문영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 그리 놀라지 않는다. 덤덤하게 잡지에 시선 두고 있다)

-보민 나, 걔랑 만나도 돼?

-문영 (좋은 얼굴로 보민 보며) 그걸 나한테 물어.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지.

-보민 (망설이다) 미안해.

-문영 (가볍게) 뭐가. (좀 더 기운차게) 이제 우리 잘까?


(시간 경과)


침대에는 문영이 자고 바닥에는 보민이 누워 자고 있다. 문영이 감은 눈을 슬며시 뜬다. 어둠속에서 문영의 두 눈이 빛난다.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던 문영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눕는다.


-문영 (몸을 웅크리며,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주문을 외듯)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장면 14 미니 밴 안


문영이 혼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꽃고 창밖을 본다. 뒤로 보면 현진과 보민이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떤다. 주로 보민이 떠들고 현진이 웃으며 듣는다.


(시간경과)


보민이 내리면서 문영을 보며 손을 흔든다. 옆을 보면 현진이 보민과 함께 내린다. 현진이 보민을 데려다주기 위해 먼저 내리는 것이다. 문영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차는 출발하고 두 사람이 즐겁게 가는 모습이 보인다.


장면 15 햄버거집


문영, 보민, 현진이 햄버거를 먹는다. 현진이 감자튀김 봉지를 뜯어 가운데다 쏟고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보민에게 내민다.


-현진 자.

-보민 땡큐 (받아먹고)역시 갓 튀긴게 맛있어. (바로 햄버거를 베어문다)

-현진 (문영에게도 감자 튀김을 준다) 자

-문영 어. (받아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는다)

-보민 맛있지?

-문영 (보민 보며 웃으며)나는 감자튀김 별로야. 좀 느끼해.

-보민 그럼 콜라 마셔.

-문영 응 (콜라를 마시며 힐끗 현진을 본다)

-현진 (아무 의미 없는, 친절일 뿐이었다.)


장면 16 집가는 길


셋이 걸어간다. 기말고사 이야기가 한창이다.


-보민 나는 밤새야 해. 밤 안 새면 시험 범위까지 다 못 끝내. 오늘은 무조건 밤샐거야.

-현진 그럼 나도 밤샐게.

-보민 너도?

-현진 서로 깨워주기 하자. 어때? 2시쯤 내가 너희 집 밑에서 너 부를게. 그때 나와.

-보민 진짜지?

-현진 응. 자면 안돼.

-보면 좋아. 이번 시험에 네 덕 좀 보자.


문영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걷는다. 달이 환하게 떠 있다.


보민이 먼저 손을 흔들고 인사하며 자신의 아파트 곁문으로 들어간다. 현진과 문영만 남았다. 현진이 먼저 걷고 문영이 뒤따라 걷는다. 나란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게 느껴지는 거리도 아니다.


-문영 (덤덤한 어조로)니네 학교는 이번에 수학 단원 6도 들어가?

-현진 몰라.

-문영 모른다고?

-현진 음.. 나는 시험범위대로 공부하는 편이 아니라서.

-문영 (이게 말인가 싶어서 본다. 그러다) 그럼 무슨 공부하는데?

-현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문영 그게 뭔데?

-현진 있어. 그런 게.

-문영 공부 안한다는 말이구나.

-현진 (피식 웃는다)

-문영 (더 묻지 않고 걷는데)

-현진 (갑자기) 너희 집엔 두 시 반쯤 갈게.

-문영 (이게 무슨 소리인가? 현진을 보는데)

=현진 너도 밤 샐거지?

=문영 (얼떨떨하게 대답 한다) 그렇긴 하지. 벼락치기 해야 하니까.

-현진 (결정짓는) 그럼 두 시 반. 너희 집 아래쪽에서 너 부를게.

-문영 우리 집 5층이야. 새벽에 소리가 ...

-현진 그러니까 두 시 반에 딱 맞춰 나와 있어.


문영은 현진을 본다. 당황스럽다. 분명 보민과 사귀는 사이인데 왜 문영까지 챙기는 거지? 그런데 왜 그러는지 물을 용기가 안 난다. 아니 묻고 싶지 않다.


장면 17 문영의 집 베란다.


시간은 새벽 두 시 이십 분. 문영이 초조하게 베란다에 서 있다. 문영은 고민 중이다. 현진이 부르면 내다봐야 하는가. 아니면 안봐야 하는가. 내다보자니 보민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안 보자니.... 문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새벽이라 온 세상은 조용하다. 문영의 심장 소리가 점점 커진다.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시간은 흐르는데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문영의 시선이 시계에 가 박힌다. 두시 이십 오분. 지구가 자전하는 걸 느낄 만큼 문영은 신경이 곤두섰다. 손바닥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아낸다. 문영은 한 걸음 베란다 창문 쪽으로 간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드르륵. 창문 여는 소리.

문영이 다시 시계를 본다. 두시 이십 구분. 문영은 자기도 모르게 보민의 집 방향을 본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어두운 거리를 뚫어져라 본다. 문영은 지금 현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애가 오기를. 두시 삼 십분에 현진이 와서 문영의 이름을 부르기를.


시계 분침이 한 칸 이동한다. 삼십 분이다. 현진은 오지 않았다. 문영의 얼굴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시선은 여전히 보민의 집 쪽이다.


잠시 후. 문영은 천천히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문영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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