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 2 (완)

by 브리

장면 18. 다음날 등굣길


현진이 먼저 나와 있고 문영이 피곤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온다. 잠시 현진의 뒷 모습을 보는 문영. 무표정하다. 현진의 옆으로 와 서는 문영. 태연하게 말을 건넨다.

-문영 안녕

-현진 (문영을 내려다보며 ) 왔냐.


더 이상 둘이 다 말이 없다. 마치 어제 일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문영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다. 현진은 그런 문영을 말없이 본다.


장면 19 어느 토요일

한 낮. 토요일이라 학교가 일찍 마쳤다. 문영이 차에서 내린다. 따가운 햇빛이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렸다 터덜터덜 걷는다. 현진은 없다. 그때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장미꽃을 든 한 여자가 문영에게 다가온다.

-여자 저기. 잠시만요.

-문영 (여자 보는데)

-여자 (친근하게 싱긋 웃으며) 차현진이랑 같은 차 타고 다니죠?

-문영 (살짝 경계하며 대답하는)네.

-여자 같이 가는 거 몇 번 봤어요. 나는 현진이 아는 누나에요.

-문영 (그게 왜? 떨떠름하게 보며 대답을 길게 꼬리를 뺀다)네에. 그런데요?

-여자 현진이 보러 왔는데 오늘 현진이는?(두리번 거린다)

-문영 오늘 걔는 차에 안 탔어요.

-여자 아... 딴 데 놀러 갔나 보구나. (하다가 다시 문영 보고) 나는 이세은이에요.

-문영 (뜬금없다고 생각하지만 ) 예. (고개를 꾸벅하는데)

-세은 이거 (하면서 장미꽃을 내민다) 이거 받으세요. (환하게 웃으먀) 알게 된 기념으로 주는 거에요.

-문영 (받으며 호기심으로 본다)


장면 20 학교


문영과 보민이 앞 뒤로 앉아 이어폰을 나눠끼고 과자를 먹고 있다. 흥얼거리는 두 소녀. 문득 문영은 보민의 팔목에 있는 시계를 본다. 처음 보는 거다.

-문영 이거 예쁘다. 너랑 잘 어울려.

-보민 그래? 선물 받은 거야.

-문영 차현진?

-보민 (고개 흔든다) 아니. 현진이가 아는 누나인데 세은 언니라고.

-문영 (머리속에 세은이 떠오른다. 세은이 건네줬던 장미꽃도)

-보민 그 언니는 부잣집 딸인가 봐. 자기는 잘 안 쓴다고 이런 걸 그냥 줘.

-문영 차현진이랑 친한 사이래?

-보민 현진이는 그냥 아는 누나라던데. 도서관에서 봉사활동 하다가 알게 됐대.

-문영 대학생인가?

-보민 아니. 몸이 아파서 휴학중이래. 우리보다 두 살 많대. 그 언니, 엄청 예쁘더라. 어른같아. 나도 얼른 이 똑 단발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그 언니 긴 머리보니까 너무 부럽더라.

-문영 (생각에 잠긴다)


장면 21 문영의 집 앞. 저녁


집 앞 슈퍼를 가려고 편한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111동 입구를 나오는 문영. 110동(현진네 동)쪽을 힐끗 보는데, 모퉁이에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문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본다. 어둠에 반쯤 몸을 감추고 있는 건 현진과 세은이다. 현진은 무표정하게 서 있고 세은은 뭔가를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모양새다.

-문영 (뭐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가는데, 아차. 깨닫고 멈춰선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몸을 돌린다. 문영은 입술을 꽉 깨문다.)


장면 22 미니 밴 안.


문영이 차에 타는데 보민이 현진 쪽 자리가 아니라 문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문영,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차에 올라 탄 현진은 아무렇게 않게 뒤쪽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가 앉는다. 문영은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는다.


-문영 (보민을 툭 밀며) 야. 니네 둘 무슨 일 있어?

-보민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뚫어져라 본다)

-문영 보민아?

-보민 (눈도 안 마주치고 작은 목소리로) 학교 가서 이야기 해.

-문영 (둘이 무슨 일 있구나, 분위기가 안좋다는 걸 알고 고개를 돌려 현진을 본다. 현진도 창 밖만 보고 있다)

장면 23 학교


보민은 학교 화장실 옆 벽에 기대서서 실내화 신은 발을 바닥에 툭툭 친다. 문영도 뒷짐을 지고 그 옆에 같이 기대서 있다.


-보민 헤어졌어.

-문영 (살짝 놀래서 보민을 보는데)

-보민 현진이 걔.... 나 말고도 여자가 많더라. 전생에 오징어였나봐. 세 다리, 네 다리. 그렇더라. (나름 담담하게 말하는데 말할수록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나랑 사귀는 동안에는 나만 만났다는데 거짓말이었어.

-문영 (조심스럽게) 설마....

-보민 걔랑 아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해. 같이 나가면 꼭 한 두명은 아는 척 하면서 인사하는 거 있지? 그래. 그것까진 참았어. 그런데 엊그제 세은 언니랑....(하는데 울컥 울음이 터진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문영을 보며 고자질하듯) 둘이 키스했대. 미친 거 아니야?

-문영 (놀랬다. 눈이 커지는데. 저번 밤에 둘이 서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인가?)

-보민 (본격적으로 울면서) 세은언니가 나한테 현진이랑 헤어지면 안되냐고.... 자기가 현진이 너무 좋아한대. 전에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대. 나만 없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대. 현진이랑.... 키스도 했다고....(엉엉 운다)

-문영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든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보민을 마주 안아준다. 둘이 끌어안고 있는데 주위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면서 지나간다. 문영은 보민의 어깨를 토닥토닥한다. )

-보민 (울다가 갑자기 휙 고개를 들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눈물을 닦는다. 비장한 얼굴이다.)아니야. 울 이유가 없어. 걔가 나쁜거야.

-문영 (고개 끄덕이며) 어. 맞아. 걔가 나쁜 애네. 그런 얘한텐 눈물도 아까워.

-보민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 끄덕이며) 맞어. 아까워. (허세부리며) 그리고 난 걔, 그렇게 많이 좋아하진 않았어.

-문영 (문영의 눈이 커다래진다. 보민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동안 문영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영의 거짓말. 자기기만. 사실은 현진을 좋아했던 마음. 그리고 실망했던 마음. 친구에 대한 원망. 모든 것이 한데 섞이더니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마침내 빵하고 폭팔한다. 문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후드득 떨어진다. 문영,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보민 (문영의 반응이 이상해서 본다) 문영아?

눈물 범벅인 두 소녀 뒤로 창 너머 햇살이 내려 쬔다. 바람에 흔들리는 화장실 팻말. 아이들의 두런두런 수다 소리.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수업 시작 종소리.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적이 없었던 소녀들의 서툰 첫사랑이 끝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너에게 매달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