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언제나 나로부터
맨 처음 글을 쓴다면 그건 나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로 생각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잘 쓸 수 있으니까. 자료조사를 할 필요도 없고 인터뷰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와 빈 종이, 연필만 있으면 충분하다. 훌륭한 위인의 운명적 탄생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나라는 생명체가 지구에 발을 붙이기까지 우연과 의지가 겹치고 더해진 유일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가령 내 키가 172cm로 성장하기까지 이야기도 한 재미한다. 시작은 이렇다. 나는 거제 의료원에서 태어났다. 갑작스러운 산통에 부푼 배를 붙잡고 젊은 엄마가 갈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아빠는 옆에 없었을 것이다. 부부 교사였던 부모님은 거제 학동에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고 결혼과 동시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부부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할 수 없었다. 엄마는 혼자서 작고 여린 나를 낳았다. 새까만 피부에 오뚝한 코가 반질반질했던 아기. 분유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아 일해야 하는 엄마의 진을 빼는 아기.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집으로 달려와 젖을 물려야 했던 예민한 아기가 바로 나였다.
입 짧은 아기는 엄마에게 고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해줘도 고개를 돌리는 아기를 보면 화가 솟구치다가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왜 인간이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엄마도 그랬다. 어찌어찌 분유를 졸업하고 이유식으로 넘어가니 먹는 일은 어린 딸의 흥미를 전혀 끌지 않았다. 전쟁 직후 농민의 딸로 태어나 먹을 게 없어 형제들과 다툼을 벌이며 자랐던 엄마로서는 그런 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목구멍에 빗장이라도 질렀나, 왜 음식을 넘기지를 못하는 것인가! 옆집 애들은 한입이라도 더 먹겠다고 입을 쫙쫙 벌리는데 내 딸은 무정한 짝사랑 상대의 마음같이 굳게 잠겨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는 나를 먹이기 위해 밥공기를 들고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떻게든 한 숟가락 먹이겠다고 애걸복걸하다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나는 입안에 밥을 가득 물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당시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의 원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절절히 공감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내가 엄마의 업보였다. 어떻게든 풀어내야 하는.
뛰어다닐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안 먹어서 삐쩍 마른 작대기 같은 다리로 엄마의 숟가락을 피해 도망 다녔다. 만나는 사람마다 엄마에게 그랬다.
“아이가 너무 말랐네. 엄마만 잘 먹지 말고 애를 좀 먹여요.”
무신경한 사람들의 말이 엄마를 두 번 상처 입혔다. 엄마는 점점 강박적으로 변했다. 살이 찔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시도했다. 먹는 양이 적으니까 밥보다 더 영양가 있는 거로, 뭐랄까,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철마다 보약을 달이는 것은 물론이고 고단백이라는 장어를 고아 먹이고 밥상에는 고기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시장통에서 말린 개구리를 사 와 물에 푹 불렸다가 양념 진하게 해서 국을 끓이기도 했고 염소가 좋다는 말에 진액을 사 와 한 숟가락씩 내 입에 쑤셔 넣었다. 어느 해에는 귀하디 귀한 녹용을 사 와서 약탕기에 넣고 직접 달였다. 거의 광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살찌지 않았다. 삐쩍 말라서 늘 저체중이었다. 조금만 많이 먹으면 바로 토하고 배가 아팠다. 식사 시간은 고통이었다. 엄마가 눈을 부라리며 내가 먹는 걸 감시했기 때문이다. 골고루 먹는지 안 먹는지, 한 공기를 다 비우는지 안 비우는지에 따라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쯤 되니 나는 몹시 억울했다. 나라고 살이 안 찌고 싶었겠는가. 나도 알았다. 내가 평범한 축에 들지 않는다는 것. 뼈다귀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사실을 말이다. 옷을 사러 가면 엄마가 옷가게 점원에게 “많이 먹는데도 얘가 살이 안 쪄요.”라고 변명 같은 말을 덧붙이는 걸 가만히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서 내 성격과 사회성의 틀을 만들었다.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그런데 살을 찌우려고 먹었던 한약과 녹용과 갖가지 몸보신 재료들이 다른 쪽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꾸준히 자라던 키는 중학생이 되자 어느덧 165cm를 넘어서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170cm에 다다랐다. 나의 성장은 대학생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키는 조금씩 더 커져서 대학 졸업할 때는 172cm. 컨디션 좋은 날은 173cm도 찍는다. 초등학교 때 제일 컸던 남학생을 고 3이 되어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애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애는 6학년 때 키 그대로였고 나만 대나무처럼 쭉쭉 커져 있었다. 가족들이 큰 편도 아니다. 나만 컸다. 이건 엄마의 의도치 않은 성과였다. 이게 나한테 좋은 거였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대학교 다닐 때 내 별명은 ‘전봇대’에서 ‘전’만 떼어낸 ‘봇대’였는데 부인하기 어려울 만큼 그럴싸했다. 길고 가느다란 건 다 어울렸다. 학교 가느라 만원 버스를 타면 눈 아래 여자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이 올망졸망 보인다. 그리고 머쓱하게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다. 바싹 마른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큰 키는 나를 강렬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름은 몰라도 ‘키 크고 마른 애’ 하면 그게 나였다. 이건 이중의 고통이었다. 하나만 하지. 하나만. 신은 필요 없는 걸 주고 정작 필요한 건 모른 척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키 10cm쯤을 떼어주고 10kg을 얻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불공평하고 사람은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님은 어땠을까? 키라도 키웠으니 당신들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고 안도하셨으려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 나이가 되고 나잇살이라는 게 붙으면서 조금 보기 좋아진다 싶어지면 몸이 아프다. 그러면서 또 살이 쭉 내린다. 임신했을 때도 양수와 아이 무게만큼만 찌고 말았다. 내 유전자에는 지방을 축적하는 힘이 없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이 저체중이 병의 원인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키는 큰 키를 선호하는 사회 덕분에 곧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여전히 필요 없는 것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사람들이 내 키를 물어보고 대답할 때마다 나는 내가 먹던 갖가지 몸보신 음식과 약의 냄새가 떠오른다. 가스레인지 위 큰 냄비 위에서 푹푹 끓여내던 장어와 개구리. 열기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엄마가 조심스럽게 기름을 걷어내면 누런 기름 덩어리들이 내 비위를 뒤집었다. 뽀얀 국물을 대접 가득 담아 마시라고 하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맛이 더럽게 없었다.
“안 먹을 거야? 진짜 안 먹을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어린 나를 찔러댔다. 젖은 눈을 꼭 감고 꿀떡꿀떡 마시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는 비정했다. 그땐 참 엄마가 싫고 무서웠다. 지금은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의 노력이 너무 애달프다. 애쓰면 될 줄 알았겠지. 그러나 헛된 노력도 노력이고 그것이 어떻게 꽃을 피울지는 모를 일이다. 나의 키처럼 말이다. 나도 엄마도 그때 최선을 다했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