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매달려 1

by 브리

#1. 수민, 오해받다

공항에 내렸을때부터 이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여자들이 수민을 힐끔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녀가 마주보면 황급히 눈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서울 강남에 도착해서는 더 심해졌다. 대놓고 따라다니는 사람까지 있었다. 밥을 먹는데 창밖에는 어린 여자애들 한 무리가 핸드폰을 들고 쑥덕거렸고 호텔을 찾느라 잠시 길을 멈춰섰을 때는 그 애들 역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수민을 찍었다. 도대체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명수배범이라도 된 건가? 15년 만에 온 한국은 요지경 세상이었다.


검은 티와 블랙진, 튼튼한 워커를 신고 커다란 배낭을 멘 수민은 그냥 여행객이었다. 특이한 거라고는 키가 좀 크다는 거. 그렇지만 173cm쯤 되는 수민의 키는 스웨덴에서는 별로 큰 것도 아니었다. 수민은 고민에 빠졌다. 아니면 내가 예뻐서 그런 건가? 지금부터 일주일 전이라면 그렇게 믿었을 수도 있다. 일주일 전 스웨덴에서 수민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비행기를 타기 전 긴 머리는 싹둑 잘라버렸고 미니스커트는 옷장에 쑤셔 박아 넣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카락은 잘렸다. 현우 일로 대화하던 중 수민의 오빠 수호가 흥분해서 날뛰다 선반을 쳤다. 그 선반에 목공용 본드 캔 하나가 있는 건 선반을 친 수호도 그 아래 앉아 있던 수민도 몰랐다. 수호의 무식한 힘에 선반이 무너지며 본드가 수민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곱게 기른, 검고 긴 수민의 머리카락 위로 흘러내렸다. 끈적한 본드는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로 폭팔한 수민은 수호의 옆구리에 어퍼컷을 날린 뒤 미용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용사에게 가능한 짧게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수호 보란 듯이, 수호가 더 미안해하라고. 그랬더니 미니스커트가 어울리지 않았다. 수민은 수호의 옷장에서 티셔츠와 겉옷, 모자를 가져와 캐리어에 넣고 그에게 문자를 보낸 뒤 집을 나왔다.

나 당분간 나가 있을게 연락하지마. 연락해도 안 받을거야.


부모님은 수민이 어디로 갔는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냥 수호와 싸우고 화가 나서 친구집에 가 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3일정도 지나면 마야, 요헨슨, 이안에게 전화를 걸어 수민의 안부를 물어보고야 알게 될 것이다. 수민이 스웨덴에 없다는 걸. 수호는 또 화를 낼 게 뻔했다. 바보같은 동생이 바보같은 짓만 한다고 난리치겠지. 이번엔 선반이 아니라 수민의 방문을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수호가 뭐랬더라?


“지금 학교를 때려치고 그 새끼 찾으러 가겠다고? 제대로 미쳤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오빠같이 심장이 강철로 된 사람은 모른다.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수민은 현우를 찾기 전까지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현우는....


수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현우는 현재 그녀의 목적지였다. 영국에서 열린 세계클라이밍대회에서 만난 현우는 3개월 전에 소식이 끊어졌다. 메일도 전화도 SNS도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수민은 걱정이 되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수호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한국에 와 있는 것이다. 현우를 찾으러. 현우와 함께하기 위해.


“그나저나 호텔이 어디야?”


가지고 있는 돈이 넉넉하지 않아 좋은 호텔을 예약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길 찾는게 너무 힘들다. 날은 어둡고, 짐은 무겁고, 심장은 조여들었다. 얼른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망할 시선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수민은 가방을 뒤져 모자를 꺼내썼다. 한국 사람들은 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취미인가보다.


“저기....”


열다섯발자국쯤 떨어져 있던 여자애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자 오히려 반가웠다. 수민은 몸을 돌려 여자애를 바라봤다. 너덧살 어릴까? 눈이 마주치자 여자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네?”

“혹시 루오?”

“뭐요?”

“루오...맞죠?”


루오가 물건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여자애가 아주 좋아하는 건 알겠다. 수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여자애는 뒤에 빠져 있던 친구들을 불러왔다. 열대여섯 명 소녀가 달려왔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 벽에 둘러싸였다. 일대일과 일대 다수는 다르다. 수민은 여자애들의 기세에 눌려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루오?”

“아닌가? 그런데 엄청 닮았는데.”

“루오 맞는 거 같은데?”

“나 공방 가서 루오 봤는데 딱 이렇게 생겼어.”

“그런데 루오가 왜 여기에 있어?”


한꺼번에 한국말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한국말을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로 들어 본 적이 있던가. 스웨덴에서 수민이 살던 웁살라는 도시 통틀어 한국인이 다섯 명이 될까 말까할 정도였다. 수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린 여자애들이 소매치기는 아닐 테고 이상한 종교집단에서 나온 건가? 슬슬 겁이 나던 참에 맨 처음 말을 걸었던 여자애가 한 걸음 더 나섰다.


“저기. 오빠. ”


오빠? 수민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지금 이 여자애가 나를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누가 봐도 나는 여자인데?


“오빠 지금 회사 몰래 놀러 나온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인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해맑은 소녀들이 수민이 모르는 신종 한국 사기꾼일지도 모른다. 수민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여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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