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민, 깨닫다.
여자애들 무리에서 도망쳐 정신없이 뛰었다. 수영과 클라이밍 선수로 활동하며 다져온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로켓보다 더 재빠르게 달렸다. 당연히 여자애들은 따돌렸는데 발 닿는대로 갔더니 길을 잃어버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길에 서서 수민은 숨을 헐떡이며 맹렬히 머리를 돌렸다.
‘핸드폰을 켜야 하나?’
비행기를 타는 순간 핸드폰을 끄고 다시 켜지 않았다. 혹시나 수호가 빨리 알아차리고 전화를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뭘 정확히 알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영화에서 보니까 핸드폰으로 위치추적을 하길래 지독한 수호라면 하고도 남겠다 싶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켜지 않기로 했다. 수호의 신용카드 하나를 훔쳐왔지만 그건 정말 비상용으로 가져온 거였다. 급한 일 아니면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디지털의 힘을 빌릴 수 없으니 대신 스웨덴에서 지도를 꼼꼼히 검색했고 가능한 모든 정보를 미리 찾아왔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어쩌지?’
이제 수민은 한국의 거리를 걸어다니는 게 무서웠다. 스웨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겁먹지 않았을거다. 그러나 여긴 한국이었고 한국에 수민이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오직 현우뿐이었다.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던 수민은 골목 바깥쪽에 사람이 없는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고 그리로 갔다. 어디든 앉고 싶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잠깐 모자를 벗고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도로를 따라 꼬리를 물고 오고 갔다. 스웨덴과는 차원이 다른 소음이다. 환한 가게 조명들, 커다란 전광판에서 쉴새없이 나오는 광고들, 밤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아직도 환하게 불이 켜진 빌딩들. 수민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다섯 살때 떠난 한국은 낯설다. 엄마 손을 잡고 비행기를 타러 가던 길이 기억에 남아 있다. 수호가 입이 잔뜩 내밀고 싫은 티를 팍팍 냈는데. 그거 말고는 나머지는 뿌옇다. 아! 또 하나. 중국집에서 먺었던 짜장면이 생각난다. 스웨덴에 가서도 한동안 그게 먹고 싶어 엄마를 졸랐다. 엄마와 수호 말고도 여럿이서 먹었는데 수민과 나란히 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나눠 먹었던 아이도 기억난다. 둘이 입 주변에 새까맣게 짜장면 소스를 묻히고 먹으며 발로 장난질을 쳤다. 그래. 그 아이. 그 아이 옆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던 엄마, 아니 엄마는 그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엄마가 아니다. 수민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이모. 이모였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수민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눈앞에 시내버스가 한 대 서 있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여자애가 핸드폰을 들고 어쩔 줄 몰라서 허둥지둥 하는 게 보였다. 수민은 얼른 모자를 썼다. 그 여자애는 검지 손가락으로 수민을 가리키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이러다 버스에서 내릴 기세였다. 진짜 그럴까봐 수민은 아예 일어서 몸을 돌렸다. 그때 수민의 눈앞에 버스 정류장 전광판이 보였다. 사람 키만한 전광판에는 광고가 걸려 있었다. 총 세 개였는데 제일 왼쪽은 성형외과, 제일 오른쪽은 피트니트 센터 광고였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이름 모를 예쁜 남자 일곱명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헤어스타일과 입은 옷이 세련되고 멋진 걸 보니 전문 모델인거 같은데 아래쪽에 ‘Goodboy 미니2집 발매 축하’라고 화려한 글씨로 적어놨다.
연예인인가?
수민이 한 걸음 다가서는 사이 여자애를 태운 버스는 떠났다. 수민은 일곱 남자와 눈을 마주다가 그 중 한 명을 보며 익숙함을 느꼈다. 누구와 닮았다. 잠시 고민하다 답을 찾았다.
짜증대마왕 수호랑 닮았네.
물론 수호보다 훨씬 야리야리하고 선이 이쁘고 귀여운 게 순정만화 속 남자주인공이 딱 이럴 거 같다. 수호는 근육질에 덩치도 거대해서 이런 느낌이 아니다. 수호가 살을 엄청나게 빼고 눈썹을 좀 정리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아니야. 그래도 수호는 이 남자처럼 예뻐지지 못할걸? 그 더러운 성격이 얼굴이 다 드러날 테니까! 머리카락을 자르게 한 장본인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기에 수민은 수호를 있는 대로 씹어댔다. 그러던 중 어떤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걸 깨달았다.
아니야.... 이 남자는... 이 남자가 정말 닮은 사람은... 나야!!!
수민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사진에 바짝 붙어 더 자세히 살펴봤다. 수호랑 수민은 닮은 꼴 남매였고 수호랑 이 남자가 닮았다면 수민도 닮은 게 당연했다. 이 남자를 중간에 놓고 남성미를 더하면 수호였고 여성미를 더하면 수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닮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나? 믿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 거였어?
수민은 이제야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광고판에 있을 정도의 남자면 유명한 사람이라는 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보고 쫓아온 거였다. 여자라고 해도 믿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누가 믿겠는가! 나부터도 안 믿기는데.
”그런데 정말 닮았다. 이 남자, 웃을 때 왼쪽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것도 나랑 닮았어.“
수민은 손가락으로 전광판 속 남자의 왼쪽 볼을 콕콕 찌르며 중얼거렸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형제가 또 있는 거 아니야? 엄마라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전화해서 물어보면 ”아아. 맞다. 니네 원래 삼남매야“ 이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수민이 막 생각해 낸 친척, 그러니까 이모 쪽 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엄마는 이모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수민의 기억 속에 분명히 이모가 있었다. 수호도 지나가는 말로 이모가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코웃음을 치며 쌀쌀맞게 응수했다.
”내 얼굴을 보렴. 그럼 되잖니?“
그때 수민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수호가 엄마랑 이모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가 그 사실을 엄청나게 싫어하니 절대 말하지 말라고.
먼지가 쌓여 있던 기억이 한번 몸을 일으키자 줄줄이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닌 기억 덕분에 수민은 아까보다 한국이 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아까는 겁나서 아무 것도 못했지만 이제는 호텔가는 길을 물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얼른 호텔을 찾아서 체크인을 하고 샤워를 하고 싶다. 그리고 뭐 좀 먹고 푹 자야지. 내일 아침엔 강원도로 가야 하니까. 현우. 현우를 만나러 가야지.
수민이 자기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짚어갔다. 소녀들을 떨쳐내느라 골목으로 꺾어서 뛰었던 터라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로 안쪽에 있는 작은 사거리를 지나 그 앞에 있던 슈퍼마켓 오른쪽으로 돌았는데 눈 앞에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 썼다. 아까 같은 일은 또 생기지 않겠지?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수민은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걸었다. 모자챙 아래로 주위를 둘러 보는데 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 얼굴이 낯익다. 수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이 상대가 먼저 수민을 보고 외쳤다.
”어! 루오 오빠!“
맙소사! 아까 그 소녀들이었다. 지금까지 수민을 찾아다녔던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두렵지 않다고, 이제는 한국의 공기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수민은 멈칫 뒤로 물러 섰다. 사람 한 명은 괜찮지만, 무리를 지어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소녀들의 눈에는 광기가 어려있었다.
재빠르게 수민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각도가 좋지 않았다. 기우뚱한다고 인지하자마자 눈앞에 장애물이 보였다. 원래 거기 있었던 건지, 노란 플라스틱 통이 슈퍼마켓 앞에 쌓여 있었다. 수민은 그걸 피하려고 어깨를 더 뒤로 넘겼다. 그러다 발목이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균형을 잃었다. 순식간에 수민과 플라스틱 통이 한데 얽혀서 나동그라졌다.
”아악!!!!!!“
수민의 비명과 소녀들의 비명, 그리고 슈퍼마켓 문을 열고 나오는 사장의 고함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