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매달려 5

by 브리

# 수민, 결심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바닥을 뒹굴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119 구급대가 와 있었다. 한국 구급요원들은 슈퍼맨인가? 빛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들것에 실려 ‘아니 이렇게까진 안 하셔도 되는데’라고 말할 틈도 없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구급대원들은 수민이 몸을 일으키려 하면 팔로 강하게 누르며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심하게 굴렀기 때문에 정확한 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안정을 취해야 한단다. 목에는 목 보호대가 채워져 고개를 돌리기도 어려웠다.


머리에서 피가 좀 나긴 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문제는 발목이다. 넘어진 직후 슈퍼에서 달려나 온 중년 남자가 수민을 부축해서 일으키려 했을 때 발목에서 정말 엄청난 통증이 밀려들었다. 소리를 꽥 지르려는데 머리에서 끈적한 게 흐르는 느낌이 나더니 어지러워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자애들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수민이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자 슈퍼주인 남자가 119에 전화를 했다.


그 길로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응급실로 갔더니 거긴 아수라장이었다. 살면서 병원을 거의 가 본 적이 없는 수민으로서는 비명과 고함, 그리고 아이 울음소리가 혼재한 살벌한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곤해 보이는 의사가 달려와 플래시로 동공 반응을 보고 잠시 수민의 머리와 다리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구급대원에게 사납게 말했다.


”우리 못 받는다니까요. 지금 봐요. 교통사고만 세 건이에요.


의사의 태도는 수민을 주눅 들게 했다. 구급대원이 뭐라 했는지 모르겠지만 수민은 일단 응급실 안쪽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간호사 한 명이 나와 수민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아서 기다리면 의사 선생님이 필요한 조치를 해줄 거라고 안내했다. 수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상처를 만져보니 파가 엉겨 붙어 껄끄러웠다. 피가 나긴 했지만 찰과상이다. 왼쪽 발목을 조심스럽게 구부려보자 아픔이 밀려왔다. 지금 발목은 퉁퉁 부어 있어서 구급대원이 얼음팩을 대고 붕대로 감아주고 갔다. 꼴이 엉망이다. 수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북새통에도 가방을 놓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병원 치료비는 어쩌지?’


스웨덴에서 가지고 온 돈은 공항에서 환전하니 50만 원 정도였다. 그만한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수민은 가늠하지 못했다. 한국행 비행기표가 너무 비쌌다. 이 와중에 갑자기 병원까지 오다니.


‘그냥 갈까? 병원비가 많이 나오면 어떻게 해?’


수민은 가방을 품에 꼭 안고 고민했다. 사람이 많으니 이대로 일어서서 나가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치료는 받아야 할 텐데…. 이 다리로 현우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지갑 속에 넣어 둔 수호의 신용카드가 떠올랐다. 이건 수호의 카드를 쓸 만큼 위급상황이다. 다친 걸 알면 그래도 오빠인데 걱정을 먼저 하지 않을까? 오빠가 오기 전에 먼저 강원도로 가서 현우를 만날 확률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수민의 시간은 응급이었다. 찬찬히 생각하고 결정할 틈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움직이고 어떻게든 이 고난을 지나가게 만들어야 했다. 현우를 만날 때까지는 그래야 했다. 불행히도 계속해서 시장바닥 같은 응급실이 이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밀어 부쳐야 한다.


좋아. 결정했어.


수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은 도망이다. 발목이 삔 정도는 혼자서도 치료할 수 있다. 클라이밍 하면서 이 정도 상처는 꽤 겪었다. 애초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영을 가르쳐 준 미헬이 그랬다. 물에 뛰어들 때는 결승점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라고. 그리고 잠깐이라도 스트로크를 멈추지 말고 움직일 것. 클라이밍도 마찬가지다. 올라가야 할 곳만 생각한다. 수민은 배운 대로 행동하는 스포츠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주위를 둘러보니 수민의 왼쪽에 앉아 있는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에게만 신경 쓰고 있다. 아이는 작고 통통한 팔에 수액을 맞는 중이었는데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색색 숨소리를 냈다. 수민의 오른쪽에는 술에 취한 건지,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중년의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양쪽 다 각자의 이유로 주변에 무심했다. 간호사도 바빠 보이고 수민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응급실 입구 쪽은 적당히 붐볐다. 움직이기에 적기였다. 수민은 태연하게 행동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다친 발목에 통증이 찌르르 전해졌지만, 꾹 참고 응급실 문 쪽으로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발 들고 깡충거리며 뛰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수민은 별다른 일 없이 응급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탈출은 쉬웠다. 그녀는 가방을 뒤로 메면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자 모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그 슈퍼마켓 앞에 버려져 있는 게 확실했다.


“팬(fan:한국어로 젠장 정도의 욕)! 모자부터 사야겠네.”


머리카락을 털면서 수민이 투덜거렸다. 아니 약부터 사야 한다. 한국에도 헬로산(연고)이나 살브퀵(반창고브랜드)은 있겠지? 수민이 환한 응급실 사인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어두운 주차장에서 바쁘게 걸어오던 한 남자가 수민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수민도 덩달아 놀랐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소녀 떼에게 쫓겨 다닌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설마 저 남자도 그런 부류? 수민은 잔뜩 경계하며 남자를 주시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빠른 걸음으로 수민에게 다가왔다. 수민은 왼발을 끌며 뒤로 물러섰다.


“저기. 혹시….”

“저 아닌데요?”


아니라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남자는 평범한 30대처럼 보였다. 품이 넓은 바지에 회색 셔츠를 입고 반듯하게 넥타이도 맸다. 직장인일까? 학생? 세상에 멀쩡해 보여도 미친놈은 많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라니까요. 사람 잘못 봤어요. 롯 마이 버러 이프레드, 딘 이디옷! (스웨덴 어로 나 좀 내버려 둬. 이 멍청아)”

“네? 아, 뭐라는 거야? 저기 잠시만요. 진정하시고.”

“당장 물러서요. 소리를 지를 거에요!”

“저기. 그런 거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자자. 침착하시고.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저는...”


조금만 더 목소리가 높아져도 응급실 안 사람들이 뛰어나올 거리였다. 남자가 횡설수설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수민은 나름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속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중이었다. 머릿속에는 어설프게 배웠던 호신술이 스쳐 지나갔고 어이없게도 우락부락한 수호의 얼굴도 둥둥 떠다녔다. 수호가 “넌 세상을 몰라”라고 말하며 비웃던 것도 떠올랐다. 오빠가 말하던 게 이런 거였어. 수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앞에 선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운동화, 검은 트레이닝 복 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인가? 또 남자? 다른 남자는 검은 색 점퍼의 후드를 뒤집어쓰고도 부족한지 모자에 검은 마스크까지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뿌연 조명등에 보이는 건 흰 티셔츠뿐으로, 그 모습이 수민의 눈에는 마치 팔다리가 없는 유령같이 보였다.


아아아아악!!! 몰라. 난 몰라. 내가 겁이 없었지. 그냥 병원에서 얌전히 치료받을걸. 미쳤어!


비명도 못 지르고 새파랗게 질려버린 수민은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바로 몸을 돌렸다. 그랬다고 믿었다. 지금 열심히 안쪽으로 뛰어가고 있다고. 그러나 수민의 몸은 제자리에 그대로였다. 강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령이 수민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으악!”


오늘 두 번째 수민의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그러나 날카로운 비명은 수민의 입을 막는 손에 의해 중간에 꼬리가 뚝 끊어졌다. 수민이 숨을 멈추는 동시에 옅은 풀냄새가 훅 풍기더니 아주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혹시 수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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