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다. 음악적 감수성이 있고 시각적 자극에 비해 청각적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자연의 소리나 아름다운 음악에 '미친 듯' 감동이 잘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소음이라고 분류하는 것들에 쉽게 지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가끔 여러 가지 소리가 분리되어 한꺼번에 들어오거나 아주 미세하게 나는 잔여음도 잘 들린다(-천재 작곡가들처럼 그렇게 엄청난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소머즈도 아니다-). 재밌는 건 가끔 얼굴이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은 사람도 목소리를 들으면 더 빨리 관련된 기억이 오기도 한다.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잘 몰랐는데(-특별히 불편한 일은 없었다-) 지난해 몇몇 친구들이 이야기해 줘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운드 힐링을 배우면서 나의 청각적 수용 능력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로 엄청난 힐링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글 쓰는 일 말고 요즘 종종 하는 일은 자연의 소리를 채집? 하는 것이다. 장비라고는 나의 오래된 아이폰이 있을 뿐이다(-외국에서는 내 폰이 친구들 꺼에 비해 늘 좋아보였는데 한국 와서는 폰 좀 사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학생 때 엠피3으로 온갖 소리를 채집하고 혼자 만족하던 그때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싱잉볼의 주파수와 맞는 다양한 자연의 소리를 찾아 담아보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주 빈번히도 바람 소리가 모든 소리를 이길 만큼 강하다. 다 녹음하고 들어 보면 어이없게도 바람 소리만 슝슝- 난다. 바람 소리에 귀가 터질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해녀 어머니들의 소리를 담고 싶다. 상업적으로 하는 공연 같은 노래 말고 어머니들의 삶이 녹아있는 세련되지 않은 ‘좀 못 부르는 노래’ 말이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이상하게도 너무 완벽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거부감이라기보다는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예전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완벽한 무언가를 보고 자주 ‘와와-’ 했었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좀 빈 공간이 없으면 금방 답답해진다. 제주에 온 동생이 얼마 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드라마 한 편을 추천했다. ‘리틀 드러머 걸,’ 한 편만 봤는데 너무 잘 만들어서 피곤했다. 각 장면마다 아귀가 너무 잘 맞아 들어가고 그의 연출적 의도와 센스가 완벽해서 머리가 아팠다. 물론 난 그런 재주도 없지만 그래서 빈 공간을 더 많이 창조? 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물가 근처에 있다가 물질하고 나오는 어머니들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주황색 태왁*이 바다 위에 평화롭게 동동 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뭍으로 점점 다가오는 그 물결을 보며 ‘의도된 욕망’으로 가득 차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어머니들의 노래를 오늘은 꼭 들어보리라. 휘파람 소리 같이 들려오는 그 숨소리(- 일명 숨비소리-)도 채집해 보겠다.
어머니들은 무거워진 태왁+망사리**를 힘겹게 뭍으로 끌며 올라오고 계셨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가까이 갔는데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 욕망이 좀 부끄러워졌다. 매일의 일상일 그 모습 자체에서 한 단어만 떠올랐다.
‘그럼에도’
이래서 저래서 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한다 할 때의 그 '그럼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에너지가 젊은 나보다 더 강했다. 노래를 불러달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닥치고 오늘의 수확을 함께 날랐다. (또 여담/ 망사리 정말 무겁다. 몇 번 들다 보면 손에 그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그만큼 무겁다. 고령의 어머니들은 젖은 무거운 해녀복에 그걸 등에 메고 불턱***을 향해 투벅투벅 걸어가신다.)
* 태왁: 해녀가 수면에서 몸을 의지하거나 헤엄쳐 이동할 때 사용하는 부유(浮游)도구
**망사리: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그물망으로 ‘태왁’에 매달아 한 세트가 됨
*** 불턱: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을 한 후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닷가에 돌을 둥그렇거나 네모지게 쌓아 만든 공간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