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다가 점을 찍어 나만의 독특한 문양을 만들어보는 수업이 있다고 하여 제주시까지 갔다. 집에 와인병이 많이 굴러다니는데 그걸 꽃병으로도 쓰고 그냥 장식으로도 쓴다. 선물을 준 사람, 술을 함께 한 사람들을 기억하기에도 좋아서 다는 버리지 않고 추억처럼 잘 모아두는데 그동안 어지간히도 먹은 거 같다. 이 아이들을 변신시켜보면 재밌겠네 싶었고 이미 내 머릿속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병들이 줄줄이 들어찼다.
그런 욕심으로 헐레벌떡 가서인지 내 마음만큼 원하는 자리에 점이 예쁘게 찍히지 않았다. 색이 마르기도 전에 이건 아니야 하며 밀어버리길 수 차례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자 반복적으로 점을 찍는 그 순간이 좀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고요의 틈 사이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때 떠오른 이미지들을 순서 없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그중 하나는 어릴 때 꾼 꿈이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내 온몸에 깨? 가 아주 촘촘히 박혀 있었다. 너무 소름 돋아서 그날 학교 가서도 그 이미지가 계속 맴돌았다.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칠판을 천천히 긁어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하게 싫어서 얼마나 싫었더라 하면서 떠올려보는 그런 거였다.
그리고 터키에서 내가 실제 본 이미지들. 히잡을 쓴 여자들이 물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붓을 톡톡-칠 때마다 잉크가 떨어지며 색과 형태가 만들어지던 그 모습. (그녀들은 자신들이 하는 걸 ebru art라고 했다) 물이라는 캔버스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잉크 점들. 또 다른 하나는 골무 같은 기다란 모자를 쓰고 치마폭이 아주 넓은 하얀 옷을 입고 빙글빙글 돌던 사람들. 그들은 누군가 그만하라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이라기보다 본인 스스로가 거기에 푹 빠져서 일종의 희열 같은 상태에 가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한 시간 여 동안 그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취한 것처럼 함께 돌고 있는 거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다음에 뭘 할 건지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텅 빈 순간들의 연속이 꽤 길었던 것 같다. 남자들은 일층, 여자는 이층에서 관람할 수 있어서 나는 이층 난간에 자리를 잡고 그 모습을 내려다봤는데 좀처럼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심원 물결, 그 환상적인 이미지가 떠올랐다. 남자들도 이층에서 같이 보면 더 좋을 텐데.. 이 물결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는 이층이 확실히 vip석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걸 그리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나는 오른손에 희미한 화상흉터가 있는데 그게 내가 찍고 있는 점들 같은 거다.
내 돌잔치 때의 일이다. 아빠는 나를 어르고 있었고 그때 아빠 품에 안겨 있던 내 앞엔 미역국이 있었다는데 그게 그대로 나한테 쏟아졌다고 했다. 펄펄 끓는 뜨거운 국 안에 미역이 보들보들한 아기 손 전체를 덮었고 나는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평소 잘 울지도 않고 순한 아기였는데 그렇게 심하게 우는 걸 그때 처음 들어보았다고 했다. 그날이 노는 날이라 병원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부모님은 나를 업고 이리저리 뛰며 문 연 병원을 찾느라 애를 먹으셨다고 했다. 화상 흉터가 남았고 자라면서 서서히 흐려졌지만 언제나 난 그 손을 내놓는 것이 부끄럽고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남자애들 몇은 너 사실 파충류인데 진화가 덜 된 거 아니냐고 (지겹지도 않은지 계속) 놀렸는데 그 별일 아닌 유치뽕짝스런 장난에 난 참 서럽게도 울었다. 매번 그렇게 발끈했는데 나중에 그 친구 왈 내 반응이 한결같이 재밌어서 자꾸 그러고 싶었다고 했다. 여하간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과 함께 그 점들은 흐려졌다. 예전엔 왠지 모르게 대중 사우나처럼 뜨거운 열기가 있는 곳이 싫었는데 지금은 훅훅-찌는 이런 날이 오히려 좋다. 더운 나라들로 다니며 살이 자글자글 타는 느낌에 익숙해졌는지 추운 날 덜덜 떠는 거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나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오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찍힌 점들을 보면서 거기에 균열을 내고픈 나의 무의식을 읽었다. 완벽한 선생님의 작품을 보다가 내걸 들여다보고 절망한 나머지 나를 합리화하고 싶은 거였다고 하신다면 할 말은 없다.
이상은 두 시간 여 점을 찍으면서 돌아다닌 저의 무의식 탐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