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You inspire me

허용하기

그게 뭔데?

by Iris K HYUN





허용하세요. 그것이 당신에게 오게 허용하세요.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간절히 매우 원해요.라고 말했을 때 들은 말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쫒지 말고 허용하라는 거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건 아마도 코팡안 섬에서 만난 한 외국인(국적은 모르겠음) 청년에게서였던 거 같은데 본인이 무슨 성자라도 되는 양 나한테 안달복달하지 말고 좀 허용하라고 했다. 일리는 있지만 돌아서면 뭐 어쩌라고 싶은 그런 류의 말이었다.


그래도 마음먹었다. 그놈의 허용 좀 해보기로. 그래 자 지금부터 모든 걸 허용 시작! 마음은 그렇게 먹었는데 바뀌는 건 하나 없는 것 같고 짜증이 났다. 예수님을 닮은 부처님 같은? 그 남자의 얼굴이 어느 순간 되게 못 생기게 보여서 더 짜증이 났다. 허용할수록(뭘 허용한 건지 모르지만) 성질만 더 더러워지고 있었다. 쟤도 분명 뒤에서는 여자 친구랑 싸우고 지랄지랄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은은하게 웃으면서 허용하세요. 하기는 쉽지, 니가 밖에 나가 한번 살아봐라. 이런 생각만 들었다. 그 섬에 살기를 할 때 내 이웃에 친구(날 이 섬으로 불렀던 친구임)까지 허용하기 실험에 동참시켰는데 그 결과 그 친구는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던 남자 친구가 떠났다. -.- 맨날 같이 친구네 발코니?에 서 있던 그 잘생긴 프랑스 남자는 위빠사나 명상인가 뭔가를 한다며 돌연 떠났는데 새로운 통찰을 얻었는지 그 길로 영영 떠났다. 허용은 이런 것인가. 우리는 달밤에 국적 불명의 노래를 부르며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네 그랬더랬다.



진짜 허용한다는 것이 뭘까. 그게 되면 삶에서 내가 진정 원하고 구현해야 하는 것들이 알아서 좍 펼쳐진다는데.. 그게 대체 뭘 의미할까.


지금 이곳 제주에서는 서울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또 다른 경험과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가끔 나도 모르게 과도하게 열을 내는 경우가 있었다. 살아온 방식과 배경은 달라도 우리는 비슷비슷한 고뇌와 번민?에 끄달리게 마련인 것인지.. 무언가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뭐라도 도움이 되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특히 누군가 조언?이라도 해달라치면 내 인생도 뭐 딱히 모르겠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꼰대 아닌 척 코스프레하는) 꼰대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오늘 내가 그에게 한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 하는 말 같다고.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세상에 태어나서 신뢰의 경험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분이 내 앞에 나타났다고 치자. 그분은 무슨 일만 일어나면 세상 탓, 남 탓만 한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해도 그건 전적으로 외부 요인에 의해 벌어진 것이다. 남이 해놓은 건 죄다 비난 일색이다. 세상에 등 처먹는 놈이 많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숨은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으신지 실제로 그분에게는 문제(-그분 기준에서-)가 많이 생긴다. 주변에서 아무리 좋게 말해도 고집불통이시다. 참다못해 그분께 한 마디 한다. “세상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거지 같아도 세상을 좀 신뢰해 보세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나는 세상을 그렇게 신뢰하고 있는가 하고.


물론 그 대상이 좀 더 과장되어 나타나기도 하나 상대는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 보기 좋은 거울일 때도 있고 꼴배기 싫은 거울 때도 있지만. 나의 텍스트에서 그 세상에 대한 신뢰라는 건 어쩌면 지금 정체된 듯 보이는 이 고요한 드라마도, 내가 원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현실도 그 자체로 그대로 좀 인정하라는 것이 아닐까... 했다.



내가 상대에게 충고한답시고 오늘 뱉은 말을 나 자신에게 하는 말로 한번 바꿔보자. 상황은 다르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관련 없지는 않을 거다. 내가 많은 공을 들여 열을 내며 한 그 말들은 특히나 더 그럴지도. 그 말을 지금 내게 해 준다고 해도 일리가 있을 때가 있다.




물에 비친 하늘 그리고 그 위를 걷는 새





그렇다면 나는 왜 기를 쓰고 거기에 열을 내는가 말이다. 가만히 잠자코 있어도 될 걸. 이걸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사람의 드라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구나. 에 이른다.

드라마도 장르가 있는 법인데 막장이 주요 코드인 걸 허옇게 세탁을 시켜서 이도 저도 아닌 재미도 없는, 정체성 모호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닐 건데. 시나리오대로 나쁜 놈 역할을 잘하고 있는 배우한테 가서 좀 덜 나쁘게 해보세요 한다면 착한 사람 캐릭터도 사라지는 꼴이 될 거다. 타인의 드라마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결국 내 드라마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허용은 내게 오는 좋은 걸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는 걸 다 인정하는 것인가 보다. 어차피 좋고 나쁜 게 없으니까(표면적으로는 있다고 쳐도). 고통인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삶에 가져온 궁극의 변화를 본다면 결코 나쁜 거라고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때 부처님 미소를 띤 그 남자가 이렇게 알려줬다면 그 얼굴을 덜 미워했을 건데. 알려줬는데 내가 안 듣고 있는 거였을 수도 있고. (여담+얼마 전 돌아다니다가 어떤 절에 들어갔다가 거기 부처님을 봤다. 그런데 웃고 있는 것이 아닌 거다. 난 왜 부처님은 무조건 미소를 띠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부처님은 그냥 나 이렇게 생겼어하는 얼굴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고통과 즐거움은 늘 한 몸처럼 사이좋게 잘 붙어 있나 보다. 서로의 존재를 위해서. 반대되는 것들은 끝에서 서로 만난다고 그러던데 그게 뭔 말인지 알 듯도 하다. 내게 두려움 내지는 고통이라고 여겼던 것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말을 건다. 그래도 난 부처님 미소 남자처럼 그렇게 고통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안 되겠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그런데 싫은 거가 다른 얼굴이 있다는 건 알기에 불안하지는 않다. 미치도록 싫은 건 미치도록 좋은 것도 있다는 증거이니까. 제철 과일이 제일 맛나듯 나의 결실도 제철이 되면 더 달콤할 거니 그때 더 맛있게 먹어야지. 고/苦 연구를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쾌/快 연구에 힘써야겠다.




때가 되면 당신을 닮은 아름다운 꽃 피우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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