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버스 타고 가면서 멍 때리기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있으면 외국에서 여행 다니는 느낌도 나서 그냥 좋기도 하지만 출발지와 도착지에서 내가 받았던, 받게 될 그날의 경험을 내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끄적이는 대부분의 글들이 이 시간에 떠오른 단상이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니 넋을 놓고 멍을 때릴 수 있다. 꿀 같은 시간이다. 카페에서, 자연에서 멍 때리는 시간도 참 좋은데 버스에서 멍 때리는 것이 유독 좋은 건 왜 일까. 생각해 본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느낌, 나는 그걸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정작 어딘가에 도착해서 받는 감흥은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기대를 많이 하고 과도하게 설렐수록 에게.. 뭐 별거 없네 하면서 시큰둥하기도 했고 무척 기뻤다 할지라도 그 감정이 쉽게 식어버리기도 했다. 40여 일 간 산티아고 길을 걸었을 때도 정작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서는 '생각보다' 감격적이지 않았다(-도착 전 마음으로 이미 너무 감격했던 것 같다-) 이 과제를, 이 프로젝트를 끝내면 정말 기쁠 거야 생각했지만 정작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냥 덤덤하다거나 당연한 일을 마친 것처럼 그래 됐네 하고 큰 한숨을 쉬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공들여서 한 무언가가 세상에 나가 사랑받고 인정받고 그런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나. 인생에 언제쯤 올지 모를 그런 결말을 상상해보면 짜릿하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상상할 때가 더 짜릿할 것 같기도 하다. 막상 그 결과가 내게 펼쳐진다면, 진짜로 펼쳐진다면.. 의외로 난 담담할 것 같다. 난 평소에 작은 일에도 혼자 질질 잘 울고 감정의 동요도 많은 편인데 정작 내가 그토록 바란 무언가가 내 인생에 이루어졌다고 상상해보면 (물론 행복감을 느끼겠지만) 그렇게까지 기쁠 거 같지 않은 거다. 정말 공들여 상상해봤는데 그러하다^^; 그리 허무할 결론을 향해 왜 가는 것이냐고 한다면 과정에서 이미 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기뻤으니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할 것 같다.(언제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억지로 가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돌진하고 어찌어찌 마쳤을 때 거기서 오는 안도감, 거기에 한 세트로 엮여 찾아오는 허무한 마음과는 종류가 다를 것이다. 가고 있는 과정이 즐거운 여정이었다면 나는 끝에 오는 그 결말이 무엇이든 편안하게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것이다.
산티아고 길에서 힘들 때는 시선이 멀리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끝도 없이 펼쳐진 길을 바라보면 숨이 턱 막혔다. 저걸 어느 세월에 걸어. 했다. 내가 걷는 지금의 한 걸음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여서 미쳐버릴 것 같은 거다. 그럴 땐 지금 딱 내 앞에 내 발만 보고 걸었다. 발에 스치는 흙과 돌을 보며 계속 왔다 갔다 잘하고 있는 내 다리와 노란 등산화에 집중해서 걸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날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해 있었다.
멈추어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르는 물 위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안정을 찾아간다. 출렁이는 그 모든 드라마가 나를 위협하는 요소 같았는데 나를 재밌게 하는 거였구나. 나를 살아있게 하는 거였구나. 지나고 보니 그 흔들림을 나는 나름 즐기고 있었구나. 한다. 못 견딜 만큼 괴로운 시간들이었어.라고 라벨을 붙여 버린 어느 구간마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게나마 웃고 기뻤던 순간이 있다. 그러니 미래가 허무하지 않도록 순간 속에 더 살아있어야겠구나. 한다. 미래가 너무 좋아도 너무 안 좋아도 나란 인간은 허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각이 드니 더욱 그렇다. 버스에 실려가며 이렇게 생각해 본다.
물가 옆 돌 위에 아주 예쁘게 물든 낙엽이 있었다. 누가 일부러 거기 올려놓고 간 것처럼 눈에 잘 띄게 돌 한가운데 꽃처럼.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안 쳐다볼 수가 없네. 혼자 중얼거렸다. 그걸 집어서 곧장 물가로 내려가 앉았는데 물 안에 초록 잎을 단 여린가지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렇게 예쁜 낙엽도 곧 다 떨어져 앙상한 겨울나무를 볼 것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록색 생명이 또 올라와 봄을 알려주겠지. 이 둘을 겹쳐서 들고 있으니 추운만큼 따뜻하고 어두운 만큼 밝은 그런 순환의 꽃다발 같다.
산티아고 길의 끝에 선물처럼 흘러나왔던 노래다. 나는 이 노래를 여정을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과 함께 들었었다.
Il mondo,
Non si é fermato mai un momento
La notte insegue sempre il giorno,
Ed il giorno verrà
그 세상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어요.
밤이 가면 언제나 대낮이 따라오고
날은 밝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