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Mar 08. 2017

산티아고 길 위에서(18)

그 열여덟 번째 이야기, '엄마와 딸'





내가 어릴 때 엄마는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로 시작하는 노래를 자장가로 많이 불러주셨다. 철없는 나이였지만 자장가가 너무 슬프게 들려서 일찍부터 엄마라는 그 자리의 무게를 그때 조금은 느꼈던 것 같다. 누워서 팔이 아프도록 몇 시간이고 동생과 내게 책을 읽어주실 때는 미안한 줄도 모르고 마냥 낄낄거리며 즐거웠는데 자기 직전 이 자장가를 들을 때면 왠지 슬펐다. 예쁘고 재주도 많은 우리 엄마가 일찍 결혼해서 좋은 며느리, 엄마, 아내로 고생이 많구나 생각하며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엄만 늘 집안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완벽하게 하며 가족들에게 웃음과 활력을 주었고, 무엇보다 동생과 내게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면을 많이 보고 느끼며 자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씩씩한 엄마 자신도 어딘가 모르게 지치기도 하고 많은 생각들로 힘들고 우울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자장가를 들으며 함께 느꼈다.      



오랫동안 한 곳을 바라보고 서 있던 말



엄마와 딸의 관계만큼 가깝고도 그리운 관계가 있을까.


딸에게 엄마란 '존재'만으로도 든든함이다. 인생에 어떤 힘든 일이 와도 그냥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큰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된다. 밖에서는 철든 어른 노릇을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언제나 아이가 될 수 있다. 내면의 나약하고 부족한 면을 모조리 꺼내 보여도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지구 상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때론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편해서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내지만 그 모든 철없음에도 내 딸이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엄마다. 본능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만 본인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그냥 허공에 대고 "엄마"라고 불러본다. 나는 평소에 스트레스받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엄마" 하고.. 괜히 할 말도 없으면서 불러보곤 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또 뭐 걱정되는 일이 있구나 하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는데 그 대책 없는 말로 날 수긍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엄마의 괜찮다'는 매번 나를 괜찮게 만들었다. 간혹 집에 들어서면 "엄마 딸~" 하고 경쾌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티아고 길



얼마 전에 티비를 틀었는데 '미운 우리 새끼'라는 나이 든 아들들과 어머니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가수 토니안이 나와 예전에 어머니가 아프실 때 응급차에 실려가신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응급차에 있던 여자 인턴 의사의 손을 잡으며 전화번호를 물으셨다고 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아들을 떠올리고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드셨다는 것이... 지금은 어머니가 건강해지셨기에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나는 보다가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머리에 종양이 생기면서 점점 의식도 희미해지시고 하루가 다르게 거동도 불편해지셨다. 하루는 휠체어에 엄마를 태우고 병원 일층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잠깐 바람 쐬는데도 금방 지치고 머리도 제대로 못 가눌 만큼 힘들어하셨다. 오래 있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가려는데 희미한 의식으로 엄마는 내게 서관 몇 층 어디로 자꾸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엄마에게 무슨 소리냐고 재차 물었는데 무조건 거기를 가야 한다고 졸랐다. 걱정이 돼서 대체 왜 그러냐고 하니 엄마는 거기에서 정말 착한 의사를 봤는데 엄마 맘에 너무 들었다며 너한테 꼭 소개를 시켜 줘야 된다고 했다. 엄마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라고 말하면서 눈물이 났다. 보통 때 같으면 웃을 일이지만 본인 몸도 성치 않으면서 잠깐 멀쩡한 의식으로 이런 일에 에너지를 내는 것에 울컥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도 딸에 대한 걱정은 본능적인 것인지.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너의 인생을 즐기며 멋지게 살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으로는 못내 내가 걱정이 되셨나 보다. 






엄마는 매번 생일과 중요한 날에 내게 잊지 않고 편지나 카드를 주셨는데.. 지금까지 모아 놓은 빛바랜 편지와 카드가 한 상자에 가득 차 있다. 엄마는 소녀처럼 가을이 되면 동네에 낙엽을 주워 오셔서 책 사이에 껴 놓았다가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에게 카드 쓸 때 하나씩 붙여서 드리곤 하셨는데, 아마 엄마 주변 분들은 엄마의 낙엽이 붙은 카드를 한 번쯤은 다 받아 보셨을 것이다. 나에게는 특별히 행운의 네 잎 클로버도 가끔 함께 붙여주셨다. 학생 때 내가 공부로 스트레스 받는다고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다니면 엄마는 욕심을 버리고 편하게 살자라고 자주 써주셨는데 수험생이 실제로 그저 편할 수는 없지만 -.- 그래도 안정이 되곤 했다.   

 






산티아고 길에서 모녀 커플을 두 차례 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일부러 말도 잘 안 하고 친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 내가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엄마와 딸이 별 일 아닌데 싸우고 투닥대는 모습도 부러웠고, 자꾸 엄마와 여행하던 옛 생각이 나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진짜 엄마랑 못 다니겠네 하며 싸울 수 있는 것도 다 추억인데 지금 행복한 줄 그들은 모르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 어머니는 피곤하셨는지 코를 정말 심하게 골면서 주무셔서 도통 같은 방에서 잘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렇게 많이 힘드셨으면서도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다 큰 딸부터 챙기시는 모습에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고 그리웠다.







한 번은 지나가는 길에 모녀의 사진을 찍어드리고 나서 그들에게 너무 보기 좋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께서 내게 너도 엄마랑 같이 오지 그랬냐며... 담에 꼭 같이 오라고 하셨다. 나도 그러겠다고 하고 돌아서는데..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는구나...라는 생각에 불현듯 찬바람이 휙 불고 지나간 것처럼 온몸이 서늘해졌다.


우리 엄마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사진 '찍히는 ' 좋아하셨다. 그런데도 여행 가면 본인 사진보다 나를 찍어주려 그렇게 애를 쓰셨다. 무척 더운   뒤를 바쁘게 따라오며 촬영하신 영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우리 이쁜 ~하며 사랑스럽게  부르고 여기 봐라 저기 봐라 하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엄마에게  그렇게 툴툴거리고 있는지... 정말   처먹은  모습에 기가 막히고 후회가 됐다.   다른 딸보다는 상대적으로 엄마와 많은  함께 하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나를 이해하고 보듬은 사랑에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너무나 많은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고 이제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즐거워도  시기였는데 이렇게 너무 빨리 떠나 버린 것이 딸로서 속상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곳에서는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시며 좋은 것들을 맘껏 누리셨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말고 자신을 용서하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삶 속에서 당신은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상실 수업' 中 -



저녁이 되어가는 Ligonde라는 작은 마을에서/  후회하지 말아요. 내 삶에서 그 어떤 것도.



https://www.youtube.com/watch?v=wc8alvxOSew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길 위에서(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