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게 백지를 줬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애초에 그랬다.
나의 기억들로 얼룩덜룩해졌다.
공간이 없다. 새로운 걸 그릴.
이미 그려진 이상적인 그림은
새로운 움직임을 초라하게 한다.
자주 의미 없게 한다.
붓을 움직였다. 열심히.
움직이는데 근육이 없는 거 같다.
흐물흐물 남의 몸뚱이처럼.
근육을 쓰는 쫄깃한 맛이 하나도 없다.
내 몸을 남의 몸뚱이처럼 써 온 건가.
뭘 그리고 싶은데?
물을 수록 답이 없어진다.
더 움직이기 싫다.
그런데 말이야 그림, 그거 다 내가 그렸다.
이상적인 그림, 그거 내가 그렸다.
내가 움직여서 생긴 그 얼룩덜룩
거기 내가 갇혔다.
예쁜 성인줄 알았는데
감옥이 되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나는 거기서 그 질문을 계속했다.
질문을 할수록 거기가 더 싫다.
나갈 궁리만 한다.
시간이 좀 지났다. 질문이 달라졌다.
나는 진짜 백지를 들고 있는 게 맞나.
얼룩덜룩 왜 만든 건가.
자꾸 묻다 보니
진짜 백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