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You inspire me

풍요로움

by Iris K HYUN


세상은 내게 백지를 줬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애초에 그랬다.


나의 기억들로 얼룩덜룩해졌다.

공간이 없다. 새로운 걸 그릴.


이미 그려진 이상적인 그림은

새로운 움직임을 초라하게 한다.

자주 의미 없게 한다.


붓을 움직였다. 열심히.

움직이는데 근육이 없는 거 같다.

흐물흐물 남의 몸뚱이처럼.

근육을 쓰는 쫄깃한 맛이 하나도 없다.

내 몸을 남의 몸뚱이처럼 써 온 건가.


뭘 그리고 싶은데?

물을 수록 답이 없어진다.

더 움직이기 싫다.




그런데 말이야 그림, 그거 다 내가 그렸다.

이상적인 그림, 그거 내가 그렸다.

내가 움직여서 생긴 그 얼룩덜룩

거기 내가 갇혔다.

예쁜 성인줄 알았는데

감옥이 되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나는 거기서 그 질문을 계속했다.

질문을 할수록 거기가 더 싫다.

나갈 궁리만 한다.



시간이 좀 지났다. 질문이 달라졌다.

나는 진짜 백지를 들고 있는 게 맞나.

얼룩덜룩 왜 만든 건가.



자꾸 묻다 보니

진짜 백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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