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재회

by Iris K HYUN



여자는 책을 덮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 가늠할 수 없다. 해가 진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자리에 있었고 애초에 파도 소리만 존재하는 듯 고요하다. 여자는 책을 원래 발견한 장소에 가져다 두기로 마음먹었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다 읽은 후 바다를 마주하는 이 순간은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거기 두면 누군가 자신처럼 또 그 책을 들춰볼 거다. 그 짜릿한 순간을 혼자만 누리기엔 주인 없는 바다가 끝도 없이 흘렀다. 이미 모든 곳에 있는 그 책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아이가 사라졌을 때 이름 모를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천국보다 여기가 재밌는 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극적인 감정들. 천국에서는 다 빛이고 사랑이고 평화이니 감정선도 생명이 다하면 나타나는 그 줄 같을 거 같아. 들쑥날쑥 잘 움직이다가 불시에 누가 그 끝을 확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일자로 곧게 난 하나의 선, 병원에서 처음 그걸 본 날 진공 상태에 별안간 던져진 것처럼 순간이지만 아주 멍-했어. 상대적 악이 사라진 세계에서 난 그 평화를 얼마나 평화롭다고 느낄까. 그 빛을 얼마나 따뜻하게 느낄까. 거긴 모든 걸 다 느끼고 여한이 없는 사람이 가야 해. 나는 그렇다고 봐. 안 그럼 얼마나 억울하겠어. 롤러코스터 한번 못 타봤는데 회전목마만 내리 타고 있어야 하니. 악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이 그 빛의 신성함을 얼마나 통렬히 알겠냔 말이야. 이 롤러코스터는 여기서 밖에 못 타는 거야. 그러니 더 생각할 게 뭐 있어. 신나게 타야지. 겁날 게 없다고.


여자는 이름 없는 남자의 눈과 그걸 들여다보는 자신이 기억났다. 고통이 웃으며 검은 등불을 켜는 느낌이었다. 등불의 재료는 넘쳐나는구나. 너무 환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때였다. 거북이가 나타났다. 바닷속에서 홀연히 등장한 그 거대한 생명체는 현실을 초월한 그림처럼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비현실적인 크기에 놀라고 그 등껍질 위에 놓인 푸른 꽃에 더 놀랐다.


아니, 너는…


거북이는 아주 느리게 모래를 쓸며 여자를 향해 눈을 끔뻑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진동처럼 퍼진 울림이 여자의 몸에 닿자 꽃의 기억을 일깨웠다.


아. 포피구나. 책에서 봤던 그 꽃의 이름은 히말라얀 포피였어.


거북이 등 위에 올려진 꽃들을 손으로 가만히 쓸자 거북이는 여자를 안내하듯 방향을 틀어 바다로 향했다. 거북이는 물결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바다 위의 길이 열렸고 그 끝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포피 꽃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꽃들은 물결 위에서 춤추듯 흔들렸고, 푸른 춤은 무한의 하늘과 맞닿았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푸른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 말고는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몸을 완전히 맡겼다. 가라앉을 것 같은 몸이 붕 떠서 하늘을 본다. 다른 섬에서 야자수 열매로 만든 용기에 담아 바다로 보냈던 새끼 거북이가 있었다. 손바닥으로 다 가려지는 아주 작고 여린 생명, 여자는 그 기억을 만났다. 바다의 이름은 불확실성이라고 했다. 거기에 내던져진 생명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세상을 살아나갈 어떤 힘도 기술도 없어 보였으니까. 잔인한 환경이라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는 두려움을 마주했다. 누군가 두려움 속에서 말한다. 나는 너의 힘을 믿어. 그녀는 거북이를 바다로 밀어 보냈다.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 거북이는 온몸으로 여자에게 말한다. 바다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나는 이렇게 성장했노라고. 거북이는 파도를 탈 줄 알았다. 이곳은 파도가 정말 강하다. 잔잔했던 반대편 해변과 다르게 화가 잔뜩 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나웠다. 여자는 한동안 몰아치는 파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면에 나오기 무섭게 거센 파도가 들이쳤고 여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거북이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팔을 내저어도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거나 허둥대는 여자 앞에서 보란 듯이 계속 나아가고 있다. 뭍에서 느리고 서툴러 보였던 그 생명은 여자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거북이는 매번 애쓰지 않는다. 파도가 뭍으로 밀려올 때는 그저 둥둥 떠 있다가 바다로 보내줄 때는 그 힘으로 쉽게 스-윽 나갔다. 밀릴 때는 미는 대로 온몸을 내맡겼고 스윽 나갈 때는 거침이 없었다.


작은 플라스틱 어항에서 키우던 거북이가 있었다. 여자가 어렸을 적에 그녀의 엄마는 거북이 한 쌍을 사주셨다. 정성껏 밥을 주고 물도 갈아주고 가끔 거꾸로 뒤집혀 버둥댈 때는 집어서 다시 바로 놓아주었다. 입을 오물오물하며 밥을 정조준해서 넣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뭔가 부족한가 싶어서 걱정이 되면 여자는 밥을 또 한 움큼 넣어주었다. 언젠가부터 밥은 자주 불어난 채로 물에 둥둥 떠 있거나 플라스틱 통에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거북이가 사라졌다. 집을 샅샅이 뒤졌다. '거북아'를 애타게 외쳐댔다. 소리를 듣는다고 자신이 거북이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결국 세탁기 뒤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녀석들을 발견했다. “대체 이렇게 더러운 데는 왜 들어가 있어.”가출 청소년을 대하듯 다그치며 등껍질을 덥석 집어 올렸다. 녀석들은 공중에서 애잔할 지경으로 팔다리를 버둥댔다. 이렇게 끝나버린 모험이 아쉬운 것인지. 여자는 안도하며 다시 집에 넣어주었다. 거북이는 깨끗해진 몸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얌전히 집에 있지 못했다. 어디론가 뛰쳐나가길 반복했다. 어느 날은 신발장에서 어느 날은 옷장 뒤에서 그리고 자주 세탁기 뒤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먼지 폴폴 나는 그곳을 나름 있을 거 다 있는 플라스틱 집보다 더 좋아했다.


여자는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한다. 그때의 헤어짐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중얼거렸다. 거북이의 소리가 가슴으로 밀려오는 숨 같다. 모든 파도가 쓰라린 고통과 시련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그건 작은 성취의 조각이기도 했고 이후에 다가올 더 큰 기쁨이기도 했다고. 바다를 스스로 배우고 돌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여자의 기억에 다른 색을 칠한다.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운다. 두려움을 마주하면 그걸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여자의 아이가 드디어 돌아왔다.


여자가 미처 펴 보지 않았던 책의 맨 뒷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무엇이든 써 내려갈 수 있는 백지가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쓰세요.

당신만의 고유한 빛을 기록하세요.

이왕이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결코 떠나고 싶지 않을 그런 이야기를 쓰세요.

당신은 그 이야기를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만약 언젠가 그 이야기 밖으로 나온다면,

당신은 기억할지도 모릅니다—당신이 진정 누구였는지를.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하지만 저는 묻습니다.

이 이야기에 어떤 이름을 써 내려가시겠어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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