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면 여자로 살고 싶어. 이 몸으로 경험하는 모든 세상이 참 좋았다고 말하고 싶어. 눈을 감을 시간이 오면 그렇게 말할래.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밝다. 왜 이렇게 밝지 하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올 정도로 밝다. 피부의 세포 하나하나, 솜털까지 정밀하게 보일 만큼이다. 여자의 몸이다. 몇 번의 경험으로 적응이 된 건지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구석에서 푸른 눈의 아이가 등에 불을 붙인다. 등은 금빛으로 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그 끄트머리에 있다. 그건 벽에서 별안간 자연발생적으로 솟은 물건처럼 존재한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열심히 오르내리는 아이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왜 하는 거야 그거? 이렇게 훤한데?
망설이다가 말했다. 모를 일 아닌가. 아이 인생에 그게 가장 재미난 일일 수 있다. 큰 업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 내가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다. 아이는 작은 핑크빛 입술을 오물거렸다.
혹시 모르잖아. 아주 깜깜해서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생길지도.
발은 다 나았어?
검은 고양이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다. 늘 이런 식이다. 주변이 너무 하얘서 그림 안에 갇힌 느낌인데 이 아이가 뛰어다니니 좀 삼차원 같다. 숨을 크게 쉬었다.
발? 발을 내려다봤다.
멀쩡한데? 발목을 공중에 휙- 돌려 원을 그리고 발가락을 꼼지락 해본다.
이제 좀 걷고 싶은가 보네.
검은 아이를 멍하게 본다. 한 군데 멈춰 있는 법이 없다. 질량 없는 물체처럼 나부낀다. 아니면 나만 중력을 받고 있는 건가.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는데 고양이가 점프를 해서 이동하면 거기 물건들이 하나씩 생겨난다. 백지에 먹물이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것처럼 그림이 생긴다. 시간의 감각도 같이 떠오른다. 아주 새삼스럽게 물었다.
몇 시야 지금?
녀석은 나의 질문을 가볍게 건너뛴다. 별 모양으로 생긴 테이블 한 모서리에 남자가 앉아 있다. 그리로 뛰어오른 거다. 남자는 노트북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자신 앞에 갑작스레 날아온 검은 고양이를 본다. 애써 담담한 척을 하는 것인지 표정에 별 변화가 없다. 고양이의 푸른 눈을 보며 이런 대사를 읊는다.
우리 의식도 순간순간 제멋대로 그렇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자.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바람처럼.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뭔가 그들의 연극에 내가 끼어든 느낌이다. 선풍기나 에어컨 광고라도 찍는 것인지.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건 그의 의식만이 아니다. 그는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로 고양이를 쓰다듬고 검은 아이는 언제 뛰었냐는 듯 노트북 옆에 얌전하게 착석했다.
난 남자 뒤로 가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백 스텝으로 슬금슬금 갔다. 고양이가 움직일 때처럼 소리 없이. 그가 편집하는 영상 속 성당의 외관은 어릴 때부터 봐서 익숙한 파이프 오르간을 닮았다. 정말이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 위에 있다.
연주하면 소리가 날 거 같아.
그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약하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거기에서 악보에만 노란 불을 밝힌 채 페달을 밟고 손가락을 움직여 소리를 만들던 여자가 떠올랐다. 이토록 장대한 울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저렇게 작고 왜소한 체격의 여성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난 그의 영상에 나오지 않는 여자, 그녀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파이프같이 생긴 저 기둥들로 마치 굴뚝에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아스라이 흩어지는 이미지를 상상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그 성당에 있었다. 하얀 눈 위에 우뚝 솟은 파이프 오르간 안에.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