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람들 사이를 너무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아서 미안했어. 줄이 풀리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내 목이라도 조를 것처럼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는 사람도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땅을 보고 내 발을 보는 게 전부야. 여기서 존재하는 이유 따윈 없다고. 그뿐이야. 꿈이니 내가 자유롭다는 것도 착각일지 몰라. 마찬가지로 그들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도 착각이겠지.
땅에 쓰인 글자들이야.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는데 뜻은 알겠어.
I. 두려움
I. 육체의 고통
I. 외로움
I. 열등감
I. 무지
I. 불신
I. 미움
I. 죄책감
I. 가식과 허영
사람들은 자신의 온몸으로 글자를 집어넣고 있었어. 나무가 뿌리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처럼 말이야. 응 말로 하니까 좀 이상한데 꿈이라 그런지 납득이 되더라고. 여하간 그들은 각자 자신이 쓴 글자를 온몸 곳곳으로 집어넣고 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워 보이는지 그 얼굴은 (세상만사 별일을 다 보고 살아서 비위가 좋은 편인 나도) 끝내 외면하고 싶었다고. 글자들이 몸을 제대로 관통해서 손끝, 발끝까지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그게 제대로 지나지 않고 머리에 그대로 고여서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있어. 보기에도 정말 딱해 보였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어떤 이는 스스로 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기도 했는데 땅에 떨어진 그는 낙엽처럼 마른 색깔로 사라졌어. 바스락-하는 소리조차 없이.
정말 장관이었어. 이 모든 장면을 내가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영화로 만든다면 꼭 한 번쯤 만들어보고 싶은 기괴한 장면이네 싶고. 아주 처음과 다르게 난 이들의 고통을 다 느끼기가 괴로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어. 일부러 눈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뭐 그렇게 또 작정하니 눈을 마주치고 말았어.
거꾸로 매달린 검은 눈동자의 여자, 익숙한 그 애잔한 눈을 보는데 그녀의 자리엔 이렇게 쓰여있었어.
I. 불완전함
그 글자를 보자마자 별안간 나의 존재의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어. 더 이상 걸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 큰 충격이 온 거야. 이 세상에서 난 부족해.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여자의 모습 앞에서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고. 다른 사람의 글자마저 자기 것인 양 집어넣으면서 정작 여자는 자기 앞에 글자를 보지 않으려고 했어. 답답해서 소리를 질렀어. 고양이의 절규를 너는 들어봤나 모르겠지만 아마 들었다며 소름 끼쳤을 거야. 여자의 몸을 하고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으니까. 가식과 허영의 글자를 마시는 다른 쪽 집단이 의외로 그 소리를 듣고 반응했어. 땅에 지진이라도 난 듯 나무 전체가 크게 흔들렸으니까.
부족해. 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여자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그 글자를 온 힘을 다해 발끝으로 보내는 모든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으로 지났어. 제법 긴 시간 같았는데 아주 찰나였어. 여자가 느끼는 것들이 내 마음에도 그대로 흘렀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보다가 충동적으로 내 앞발을 가져다 댔는데 글자가 지나며 생긴 길에 어떤 울림이 내 온몸으로 전해졌어. 해석할 필요 없는 그런 울림.
나의 아버지는 내 한 살 생일날 사랑과 함께 ‘존재의 부끄러움’을 선물로 주었어. 그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미역국이 선물처럼 내게 남긴 화상, 그 흉터가 남은 나의 손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존재의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어.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기도 했어. 그리고 그건 나의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것이기도 했지. 그리고 또 그건 아버지의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 돌림노래는 아마도 끝도 없으리. 그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고개를 들었을 때 펼쳐진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어. 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그건 모두 어떤 존재들이었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오래된 사람들. 그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저마다 서로 연결되어 나무의 커다란 몸체를 만드는데 맨 아래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 모든 걸 지탱하는 뿌리가 되는 거야. 각각의 나무들은 놀랍게도 모두 다 연결이 되어 있었어. 그러니 글자가 어떤 특정 사람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스쳤지.
그때 누군가 날아가는 게 보였어. 고개를 그쪽으로 획 돌려 보니 나무에 매달려 있던 사람 하나가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하늘로 날아가는 거야. 발에 묶인 끈이 저절로 스르륵 풀리면서. 놀라지 말라고. 글자를 먹고 난 그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난 거야. 글자를 소화하고 싶지 않아서 애를 쓰고 토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았잖아. 그 사람들은 어쩌고 있냐고? 그 사람들은 붉은 얼굴로 밧줄이 세월에 삵을 때까지 기다려. 그이의 글자는 그곳에 남아 다음 타자인 후손 애벌레의 활약을 기다리지. 자신의 글자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소화를 시켜서 몸 아래로 보낸 이가 받는 선물은 밧줄만 끊어지는 게 아니었어. 날개도 생기는 거였다고.
그게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모든 움직임이 얼마나 장엄한지 그 광경에 또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몰랐는데 난 어지간히도 센치한 고양이었어. 감동이 밀려왔지. 울렁거리는 마음을 그대로 쏟아내어 그들을 향해 노래를 불렀어. 응 그들이야.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여기저기서 날고 있었거든. 고양이의 노래, 당신들은 들어본 적이 또 없겠지. 아무튼 난 기쁨의 노래를 불렀어. 아주 목이 터져라 불렀어.
저주처럼 쓰인 글자가 날개의 영양분이었나 봐. 세상에. 스스로 떨어져서 빠싹 말라죽은 사람들의 몸에는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거든. 아주 선명하게. 그것도 괜찮아.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으니.
날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땅에서 찾은 자신의 글자를 소중히 품고 있었어. 품었다기보다 가슴에 새긴 것 같았어. 좀 자세히 보니 글자는 땅에 처음 썼던 그게 아니야. 용기, 건강, 소통, 포용, 지혜, 풍요, 신뢰, 이해, 자유, 진실 같은 글자로 변해 있었어. 그 앞에 붙어 있던 'I'라는 글자가 사라진 채로. 가슴이 뜨거워진 나는 아까 나를 그토록 울린 그 여자의 글자가 무엇으로 변했을지 궁금했어. 가슴이 두근거렸어. 그걸 마주할 생각에.
조건 없는 사랑
여자는 그걸 가슴에 새기고 홀가분한 얼굴로 창공을 날고 있었어.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한참이나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외쳤어.
나는 내 이름을 살았어. 히읗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