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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Mar 14. 2018

겨울의 Paris는..

춥다. + 빠리지앵의 첫인상에 관해




겨울의 파리는 생각보다 더 추웠다.

물론 한국보다 기온 자체가 그리 낮은 건 아닐 텐데도 어쩐지 더 춥게 느껴졌다.

아마도 집이 추워서 그럴 수도 있다. 보통 밖에서 몹시 추웠다 해도 집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머문 집도 파리의 흔한 오래된 집들처럼 감질나게 근처만 데워지는 약한 난방 시스템과 바닥의 한기가 그대로 올라오는 1층이라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많이 추웠기 때문이다. 추위에 취약한 체질임을 고려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추울까 싶었다.  


더군다나 2월 초 내가 도착한 그 날은 폭설이 파리 전 지역을 강타했고, 덕분에 겨울 파리는 처음부터 내게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파리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것을 수년만에 처음 본다는 현지인들의 말처럼 수북이 쌓인 눈을 보는 것은 그들에게도 그리 익숙한 광경은 아닌 것 같았다.


장 봐서 집에 가는 길



이미 비행기 창 밖으로 가득 쌓인 눈을 보며 어느 정도 예상했다. 가는 길이 험난하겠다는 것을. 공항에서 나비고 카드를 발급해준 이마저 내게 카드를 건네며 '굿럭"이라고 했는데.. 부디 이 눈사태를 잘 헤치고 집까지 무사히 잘 가렴하는 인사 같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대책 없이 크고 무거운 가방이었다. 이번에는 파리에 좀 살아야? 하기에 대형 이민 가방도 모자라 작은 트렁크까지 괜한 노파심에 꾹꾹 눌러 챙겨 온 짐은 정말이지 버리고 가고 싶을 정도로 꾸준히 나를 힘들게 했다.(정작 그중 쓰는 것은 몇 가지 되지도 않으면서;;) 예전에 짐 때문에 지하철의 수많은 계단에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기에 이번엔 일찌감치 우버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허나 우버도 인증 문제로 부르는 것에 실패했고, 폭설로 인한 교통대란을 고려할 때 리무진 버스보다는 지하철이 나을 거라는 어느 현지인의 말은.. 결과적으로 내 가방을 고려하지 않은 조언이었다. 하지만 뇌가 정지했는지 예전 기억은 어디론가 가고,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으로 지하철 타는 쪽으로 힘차게 전진을 했던 것이다.


캐널 주변, 날 좋은 날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곳이나 눈이 와서 미끄러지기 딱 좋았음


그러나 기본적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RER 노선마저 무슨 일인지 그날은 작동을 멈춰 고난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안 되니 옆 계단을 선택해 빠른 걸음으로 총총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생각었는지.. 혼자 안 되는 에스컬레이터로 무작정 진입한 후 힘겹게 가방을 내렸다. 두 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건 불가능했고, 먼저 작은 트렁크를 들어서 밑에다가 가져다 놓고 다다다 빠른 속도로 다시 올라와 이 문제의 이민 가방을 처리했다. 처음부터 아예 번쩍 들어 옮기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사이즈와 무게라 가방을 거의 몸에 반쯤 싣다시피 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옮기는 것이다.

옆의 계단으로 내려가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힘겨워 보이니 도와주고 싶으면서도 이미 다른 노선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내려온 나를 어찌 도와줘야 하나 하는 당황스러움이 함께 느껴졌다. 난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가방을 끌어내리다가 온 무릎이며 발을 다 찍어댔다.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중간쯤까지 이미 어째 내려와 버린 탓에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혼자 힘에 부쳐서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아이씨.. 정말 미치겠네..'

심지어 중간에 한번 갈아타기까지 해야 하는데 대체 이걸 몇 번 반복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니 아찔했고, 집에 다 갔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갈아타는 노선은 야외로 통과하게 되어 있어 펑펑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삽시간에 뒤엉켰고 정말 이곳이 지옥인가 싶었다.


*로뎅 미술관, 야외전시





파리 사람들은 도와주는 것도 '막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줘도 되겠냐고 물어보고 도와준다. 어쩌면 이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자신이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인 것 같다. 내가 이 난리를 겪고 있는데도 머뭇머뭇하는 것이 느껴졌고, 처음엔 선뜻 다가오지 않고 일단 어쩌나 보고 있는 느낌이다. 팔이 아파서 잠시 서 있는데 퇴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와서 내게 도와줄까 물어본다. 뭘 물어보니 그냥 제발 좀 도와줘.. 하는 심정일만큼 지쳤었다. 그 도움이 어찌나 고맙던지.. 선뜻 도와주겠다던 그 남자도 생각보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는지 계단 끝에 내려와서는 몇 번씩 쉬어가며 들었다. 그는 내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그 역에 내려서도 계단이 많을 거니 꼭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하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갔다. 이 정도 되면 택시를 타야 되는 거 아냐라고 인상을 쓸 법도 한데 너무나 환한 미소를 남기고 가는 그의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시름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온 길 쪽으로 다시 가는 걸 보니 일부러 여기까지 들어다 주고 간 것 같은데 고맙고 미안했다.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후엔 그 남자의 조언대로 도움을 요청했고, 정말 도와달라고 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선뜻 도와주었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도움이 필요하면 스스로 요청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추운날 뱅쇼(Vin chaud) 같았던 사람들:)



파리 사람들이 개인적이고 차갑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느 도시에서나 느껴지는 사람들의 인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별히 더 오만하다거나 타인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무표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사람들도 우연한 기회로 말을 하게 되면 표정이 확 달라지고 언제 차가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느낌을 주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 살지 않아 다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 달쯤 살아 본 나의 시각으론 그렇다.


한 번은 집 문이 열리지 않아 오랫동안 애먹은 적이 있다. 오래된 건물답게 길다란 옛스러운 열쇠를 구멍에 넣어 왼쪽으로 돌려 안에 걸쇠를 여는 형식인데, 아무리 오른쪽 왼쪽 한번, 두 번씩 돌리고 또 돌려도 좀처럼 열릴 생각을 않는 것이다. 이러다 집에 못 들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초조해질 무렵, 마침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오셨고, 냉랭하게 형식적으로 나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bonjour 하신다. 난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드디어 구원자를 만난 심정으로 그분께 문이 안 열린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그분은 본인 집 열쇠면서 대체 왜 못 열고 있는가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나를 경계하는 듯 다가오지도 않은 채 자신의 문 앞에 서서 천천히 다시 해 보라고 한다. 나는 열쇠를 이리저리 막 돌려며 이래도 안 돼요 하는 상황을 보여드렸고, 급기야 다급한 마음에 엉망 친창 불어로 상황 설명을 했다. '난 어제 도착했는데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그런다. 어제도 이렇게 한참 하다가 어쩌다가 열린 거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또 안 될까 봐 무섭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어색하게 내게 다가오더니 열쇠를 받아 드신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고, 어제는 분명히 열었었냐고 다시 물어본다. 그런데 웬걸 아주머니는 아주 편하게 한 방에 문을 철컥 열었고, 어 이게 그렇지 않았는데..하는 당황한 내 모습을 보며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묻는 내게 "두스멍"이라고 부드럽게 돌리라고 하시고 가셨는데, 나는 그 의미를 두 차례 정도 더 지나가는 이웃을 괴롭히고서야 깨달았다.(세게 돌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면서 그러나 열쇠는 밀면서 살짝 왼쪽으로 돌리는 요령이 필요했다;;)  

그분은 날 도와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의 요청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문 앞에 서 있으면 그 아주머니도, 늘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무서워 보이는 언니도 내게 문 잘 열리니 하고 묻는다. 원래 첨엔 다 그래라며, 격려도 해준다. 맨 처음 만났던 차가운 얼굴들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따뜻함이다.



도시에서 낯선 이와 친밀해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매우 추운 날씨에 파리에선 더 그렇다. 그러나 생각보다 외로운 사람들도 많고, 먼저 말 걸어주길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는 걸 느낀다.  


아를(Arles)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 에드가가 써(그려준) 준 하이쿠 中

추운 아침 날씨에 느끼는 사람의 정이 나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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