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로 변해버린 도시 한가운데,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사람들을 향한 위로의 연주가 울려 퍼진다. 전쟁 때문에 고통스러워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을 위한 선율이다. 이미 여러 발의 총격이 첼리스트에게 날아왔지만 다행히 안 맞은 건지, 일부러 안 맞춘 건지 알 수 없다.
그를 죽일 임무를 맡은 저격수도 건물 안에서 총부리를 겨눈 채 그의 연주에 귀 기울인다.
서점에 들렀던 어느 날,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책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오래전, 딸아이와 다녀왔던 사라예보. 예전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고, 지금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여전히 이름이 낯설다. 그곳을 여행지로 삼은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을 뿐이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있는 까닭은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감추려 해도 드러나고야 마는 슬픔이 느껴졌다. 내가 느낀 사라예보가 소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전쟁과 대학살, 혼돈의 흔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도착한 그날도 전쟁의 상처가 좀처럼 가시지 않아 보였다. 웃음기 하나 없는 사람들 표정이 무뚝뚝해 보였다. 공기조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 내리는 1월의 사라예보는 황량했다. 총탄 자국으로 얼룩진 건물이 거리 곳곳에 있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내전으로 바닥까지 드러낸 건물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의미일까? 교훈인지 되새김인지 모르겠지만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싶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드러내고 인정해야만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깨달은 것일까? 도시 구석마다 잿빛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전쟁이 불러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걷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총탄자국과 폐허가 된 건물(2014년)
1990년대 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혹독한 전쟁을 치르고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복잡한 인종과 문화, 종교적 문제로 내전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보스니아의 독립을 반대하던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면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이유를 알듯했다. 교회와 성당과 모스크가 모두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모스크에서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간, 성당에서는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이들은 한 공간에서 대립이 아닌, 공존을 선택해 살아왔다.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분리 독립운동 과정에서 인종과 종교적 이유로 관계가 어긋나고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친구와 이웃이 어느 날부터 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도시는 만신창이가 된다.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기본적인 일상이 불가능해졌다. 세르비아군은 도심의 언덕 위에서 눈에 보이는 시민을 무차별 저격하였다. 사람들은 음식과 마실 물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거리로 나아가야 했다.
언젠가 TV다큐 프로그램에서 그 당시 물자와 군인을 수송하던 지하 땅굴이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유엔이 관리하는 공항까지 800미터 정도 땅굴을 파서 물자를 공급받았다고 한다. 철저하게 차단된 외부세계와의 유일한 삶의 끈이었으리라.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분리 통치되고 있다. 지금도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 임이 분명했다.
딸아이와 구시가지를 지나 성곽에 가기 위해 언덕을 올랐다. 가는 길에 나타난 수많은 묘비들. 딸아이는 체코에서 보았던 유대인 묘비를 떠올렸다. 작은 공간에 겹겹이 솟아있던 묘비들과 함께 방문객들의 참담한 표정을 보았었다.
딸아이는 사라예보의 묘비들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태어난 해는 다른데, 죽은 해는 1995년으로 모두 같은 이유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묘비는 마을 한가운데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이리도 가까울 수 있던가. 묘비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숙연하게 느껴진다. 아픔을 끌어안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종이에 아크릴(26×36센티미터)
사라예보가 유난히 마음에 남아있다. 그들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과 다시 삶을 이어간다는 게 쉽지는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잃어서는 안 될 가치가 더 소중하기에 또다시 오늘을 사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오늘날 사라예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