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모가족 중에 촬영에 응하겠다는 분이
계신데 지역에 사셔서요….
수화기 너머 여성가족부 관계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 한부모가정 지원책에 대한 글은 여러 번 썼지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삶은 어떠한가. 이 질문의 답을 찾아 코로나19 유행 와중이지만 지방 출장을 결정했다.
인터뷰이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한부모가족 가장의 연락처를 얻어 촬영 여부를 요청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지인 찬스’를 위해 친구 녀석에게 밥과 술을 사가며 부탁을 했지만 대답은 ‘노’. 결국 여성가족부에 SOS를 보냈다. 그렇게 공무로 바쁜 공무원들의 시간을 빼앗아가며 어렵사리 섭외가 이뤄졌다. 그리고 수일이 지나 나와 제작진은 부산행 기차 안에 있었다. 열차가 웅웅 소리를 내며 플랫폼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이내 동행한 이들은 쿨쿨 잠이 들어버렸다.
카메라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일종의… 도전이에요
은혜씨(가명·43). 몇 번의 전화 통화에서 그는 항상 씩씩했다. 사는 모습을 듣고, 찍고 싶다는 요청에 그래도 화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호 웃기도 했다. 사실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잠깐의 만남으로 한부모가족의 삶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 말이다. 이런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쏜살같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부산역, 부산역입니다.”
부산역에서 다시 40여분을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젖어든 노을을 쳐다보고 있자니 잠시 후 은혜씨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를 위해 우린 다시 집으로 이동했다. 집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어색한 공기가 있었다. 불청객의 방문이 이들의 단란한 저녁시간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닐까. 나는 조금 걱정이 됐다.
스물여섯. 연애결혼이었다. 출산과 육아. 은혜씨는 아내이자 엄마, 며느리로 정신없이 살았다. 시부모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간병을 하랴, 아이를 돌보랴 은혜씨는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종교가 달라 부딪치는 문화적 갈등이나 시어머니의 모진 말이 종종 은혜씨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일도 있었다.
남편은 술을 좋아했다. 한번은 큰아이가 열에 들떴다. 아픈 아이를 안고, 둘째 아이를 들쳐 업고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불덩이 같던 아이의 몸. 냉수찜질을 하는 동안 냉수일지 눈물일지 모를 것이 하염없이 흘렀다. 응급실에서 전쟁 같은 밤을 보내고 돌아왔지만 남편은 여전히 취해 있었다. 은혜씨는 남편에게서 친정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절어 있었다. 은혜씨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이런 일은 되풀이됐다. 어느 날 아침. 그제야 귀가한 남편과의 말다툼. 다툼의 끝은 폭력이었다. 그 길로 은혜씨는 집을 나왔다. 바닷가 펜션에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쉼터에서 6개월. 이혼 후 은혜씨는 바다 건너 부산의 쉼터에서 반년을 더 보냈다. 그러다 한부모가족 지원으로 임대다가구 주택을 얻었다. 그렇게 5년여가 흘렀다.
저는 이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이혼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우울함도 컸고, 불안감도 많았다. 상담을 받거나 힘든 감정을 노트에 적기도 하면서 힘겨운 시간을 서서히 극복했다. 은혜씨가 다시 씩씩해지기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원동력은 아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도 처음부터 엄마를 이해해준 것은 아니었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아이들의 저항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떨어져 생판 모르는 곳에 왔으니까요.”
‘내가 조금만 참았다면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인터뷰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은혜씨의 입가가 잠시 파르르 떨렸다.
“학부모 모임에서 아빠를 물으면 별거를 한다고 하기도 해요. 친해지고 나서야 이혼했다고 말하죠. 굳이 먼저 나서서 밝히지 않아요. 전 괜찮아도 사회는 다르게 보니까 굳이 말하고 다니진 않는 거예요. 그게 사회적 인식의 선인지 저만의 인식의 선인지는 모르겠어요.”
은혜씨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다. 쉼터에서 틈틈이 준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아동·청소년 상담 실습을 나갔을 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적성에도 맞았다. 무엇보다 아픔이 있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사회복지사 채용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 줄이야.
지금 은혜씨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을 한다. 계약직이다. 월급은 200만원이 되지 않는다. 임대다가구주택의 거주 조건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4인가구 기준 한부모가정이라도 소득이 140만 원 이상이 되면 안 된다. 한부모가족의 지원 혜택을 포기하고 지금의 집을 벗어나 더 좋은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직 은혜씨에게는 부담스럽다.
엄마 좀 도와줘
은혜씨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막내를 호출했다. 거실에 진을 친 제작진의 모습에 아이들은 어색해했다.
“엄마 나는 도망치면 안 돼?”
“안 돼.”
곧 오늘 온라인 수업이 어떠했고, 그날이 어떠했는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저녁 밥상을 채웠다. 그러는 동안 반려견 솔이는 멍멍 짖고, 부엌에서는 카레 끓는 냄새가 났다.
은혜씨는 이혼을 선택이라고 했다. 그냥 그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자녀에게 ‘영상편지’를 부탁하자 은혜씨의 눈이 점점 붉어지고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영상). 그녀는 말했다.
엄마는 지금도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야
하마터면 빼먹을 뻔한 에피소드. 동행한 PD는 카메라를 들고 부지런히 은혜씨의 뒤를 쫓았지만 힘에 부쳐했다. 은혜씨의 걸음걸이는 꼭 달리는 것 같았다. 마치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그 평범한 저녁식탁을 생각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내일도, 모레도 은혜씨 가족의 평온한 저녁 식사가 계속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