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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Nov 29. 2019

일본의 한국사람 일본이름


자이니치 칸코쿠진 또는 자이니치 조센진

 

일본에 사는 한국인을 일본인들이 부르는 말은 여러가지다. 여기에는 혐오의 뉘앙스가 섞여 있기도 하다. 일본의 한국사람은 둘로 나뉜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거나 조선(북한) 국적인 사람으로. 이 글은 이름을 빼앗긴 한 남자의 기록이다.  

    



기둥 사이로 그가 보였다. 사내는 흰색 남방을 입은 탓에 그을린 얼굴이 더 검게 보였다. 각진 턱에 180 센티미터 남짓한 키, 건장한 체격이었다. 악수를 하며 잡은 손이 거칠었다. 삶의 질곡이 배인 손. 예순을 바라보는 사내는 오사카 효고현 출신의 재일교포 2세다. 그가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주었다. 한글 이름과 일본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ㄱ씨의 이름은 언론에 여러 번 오르내렸다. 한국에서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몇 차례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가 2007년부터 4년여에 걸쳐 만든 다큐멘터리는 영화제에 소개되었고, 서울에서도 상영되었다. 그러나 정작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2010년부터 이어진 재판 때문이었다. 그는 재판에 대해 말하길 거부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도 했다. 뜸을 들이던 그가 한참 만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덥고 습한 오사카의 여름.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글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사진=김양균의 현장보고.


가마가사키의 사람들


오사카 니시나리구의 가마가사키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산다. 여기에는 하룻밤에 500엔, 우리 돈으로 5000원만 내면 몸을 누일 수 있는 싸구려 방이 즐비해 있다. 그러나 이곳도 세월을 비켜가진 못했다. 가마가사키의 노동자들도 늙어가고 있었다. 노인들이 월세 40여만 원에 기거할 수 있는 복지맨션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최근에는 저렴한 숙소를 찾는 여행객도 가마가사키를 찾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 삯을 벌기 위해 이곳에 모여든다.


ㄱ씨는 가마가사키의 어떤 건물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각지에서 흘러온 사람들은 작은 빌딩에 주소를 등록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주소가 있어야만 일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등록된 노동자의 수는 3000여 명.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는 허름한 건물 한 채였던 셈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편법으로 판단, 등록된 주소를 일괄 폐기해버리고 만다. 졸지에 무연고자가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언감생심 투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의 다큐멘터리에는 이렇듯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딱한 사연이 담겼다.


본업은 영화감독이지만 돈 안되는 영화판 일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막노동이나 창고 관리를 하며 먹고산다. 하루 꼬박 일해 그에게 떨어지는 돈은 8000엔에서 1만 엔(8만원~10만원) 사이. 다큐를 찍던 그도 가마가사키에서 막일을 하며 지냈다.     


“2009년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이미 4개월 정도 근무를 하던 중이었어요. 하루는 일을 나가보니 ‘가네우미’라고 적힌 안전모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는 제게 일본 이름으로 일할 것을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전 대학시절부터 한국 이름을 쓰고 있었어요.”


하청업체 근로자인 그에게 원청회사가 내린 통보는 절차상의 편의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사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별도의 서류를 준비해야 했지만, ㄱ씨가 일본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ㄱ씨의 의사는 배제되었다. 선택지는 두 개. 회사 요구를 따르거나 일을 관두는 것. 넉 달간 이름을 포기했다. 생계 때문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원청회사와 2차 하청업체, 그리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는 그에게 더 이상 일을 주지 않았다. 수차례 전화를 걸어도 돌아온 것은 차가운 외면이었다. 지난 2010년 7월 드디어 첫 재판이 이뤄졌다. 두 달에 한번 꼴로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그는 혼자였다. 원청회사가 어디인지 찾는 일조차 녹록치 않았다. 네 번째 재판에 이르러서야 변호인단이 구성되어 그를 도왔다.

    

글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사진=김양균의 현장보고.

  

두 개의 이름


일본에서 한국이름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재일교포도 있다. 성공한 유명인사가 대부분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그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다수 재일교포의 사정은 이와는 딴판이다.


“재일교포는 두 개의 이름을 갖고 태어납니다. 일본에서 한국인 차별은 재일교포 1세 시절보다 덜하다고 해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센징 이름’으로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일을 찾기 힘듭니다.”


민족학교에서 한국이름을 사용했더라도 사회에서 통명을 사용하는 재일교포가 많은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오사카의 민족학교에 진학하는 재일교포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일본학교에서도 한국이름에 대한 암묵적 차별이 자행된다. ㄱ씨는 “분위기가 그렇다”고 했다.


현재 오사카에는 100여개의 민족교실이 있다. 한국의 방과후수업과 비슷한 개념이다. ㄱ씨의 학창시절에는 이마저도 없었다. 그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통명을 썼다. 한국문화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야 선배로부터 한국이름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수년간 지루한 법정 싸움이 계속됐다. 그의 재판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NHK는 그를 밀착 취재해 작년 11월 그의 사연을 소개했다. ㄱ씨와 변호인단은 NHK의 보도가 고등법원의 판결 전에 이뤄진 터라, 판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했다. 곧 승소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법원은 회사가 그에게 통명의 사용을 강제 통보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어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며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혹한 판결. 언론의 관심도 멀어졌다. 사건은 대법원으로 갔지만, 그조차도 판결이 뒤집어지리라 믿지 않았다.


“저 같은 소수자를 생각해줄지 의문입니다. 한국에서라면 저의 싸움이 이길 수 있었을까요?”


“질 것을 알면서 계속 싸우는 이유가 있나요?”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참 만에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멈추면 결국 개인의 문제로 남겠지만, 다음 세대까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물려줄 수 없으니까요.” ‘나’를 박탈한 세상에의 저항. 나는 문득 답답해졌다. 그의 고독한 싸움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 미안함이 느껴졌다.  


사진=김양균의 현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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