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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Mar 19. 2021

92년생 하늬슬씨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찾은 것


매년 각국에서 온 수만 명의 사람들이 800킬로미터가 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내의 성 야고보 사도의 무덤까지 이어지는 이 작은 오솔길을 찾는 이들은 중세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자 다르다. 그리고 92년생 하늬슬씨도 이 길을 걸었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없어.”


“엄마는?”


“누나가 엄마야.”


“왜 아빠는 없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 헤어졌어.”


“왜 헤어졌어?”


아이들이 눈망울을 굴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늬슬씨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가 설명하는 우리 가족을 그려줘” 7살 아이들에게 부탁하기)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헤어졌어


사진=하늬슬


하늬슬. 스물아홉, 1992년생.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자 유튜버인 그녀의 첫인상은 인터넷 스타, 흡사 인플루언서 같았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하늬씨는 여러 번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삶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물둘. 혼전임신이었다. 성당에서 가족들과 함께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군 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하늬슬씨는 이른바 ‘독박육아’를 도맡았다.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친정집에서 아이를 키웠다. 어린 나이에 혼전 임신을 하자 주변에서는 낙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늬씨는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첫째 아이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서너 시간씩 울 때도 있었다.


“뱃속에 있을 때 낙태 이야기를 들어서 예민한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아팠어요. 어떻게든 그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어요.”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육아 노동은 곱절로 늘어났다. 하늬씨는 몸과 마음을 누르는 육아에 서서히 지쳐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늬씨는 투정을 부릴 여유도 겨를도 기회도 없었다. 오롯이 속으로 참고 또 참아야 할뿐. 남편과의 사이에 ‘큰 갈등’은 없었지만, 대화가 원활치 않았다. 하늬씨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 또 참는 그녀를 남편은 무심하게 지나쳤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한 날은 홀로 가슴을 치고 차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일도 있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는 시간은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하늬씨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은 끝나 버렸다. 사실 이혼을 선택한 이들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늬씨는 결혼 생활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혼을 결심하기도 힘들었지만 이혼 도장을 찍기까지도 몹시 힘들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왜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지 납득시켜야 했으니까요.”


왜 그녀가 이혼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지 설득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혼을 하기까지 반년이 결렸다. 여름부터 시작된 이혼 이야기는 11월이 되서야 이혼 도장을 찍으며 ‘종료’되었다.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혼 도장을 찍은 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왜 이런 현실이 내 앞에 왔을까. 내 인생에 절대 이혼은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비록 이혼을 결심했지만 이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잠들지 못하는 밤, 공황장애 증상도 왔다.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지경까지 오자, 하늬씨는 무작정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결혼 후 저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순례길을 걸으면서 전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꿈꾸었는지를요.”


매일 걷고 또 걸었다. 잊고 있던 ‘나’라는 존재는 길 위에서 언뜻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화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며 스스로를 억눌렀던 시간동안 쌓인 마음의 짐은 순례길 위에 조금씩 가벼워졌다. 걸으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여러 번. 하늬씨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순례길 어귀마다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날, 어느 낯선 새벽을 그녀는 아직 기억한다. 붉은 해가 떠오르기 전,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길을 걸으며 그녀는 다시 모친의 뱃속에 있던 태아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멀리서 해가 떠올랐다. 사방이 주황색으로 빛나는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는 아침 해를 하늬씨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긴 어둠의 끝에서 마침내 떠오른 태양은 그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세르비아로 이동하는 길 자전거로 산비탈을 내려오던 순간도 하늬씨는 잊지 못한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에 하늬슬씨는 탄성을 질렀다.


나는 살아있어!  


순례길이 끝나갈 무렵, 하늬씨는 다시 시작해볼 마음이 생겼다.

     

사진=하늬슬


100~150만원. 하늬슬씨의 한 달 수입이다. 아직은 세 식구가 살기에는 빠듯한 돈이다. 그래서 하늬씨는 비용이 저렴한 지방의 모자가족복지시설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산다. 모자원 생활 3년을 채우고 나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을까. 더 든든한 엄마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늬씨의 소박한 바람은 오롯이 아이들을 향해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다고 어떻게 설명해요?”


하늬씨가 머리카락을 뒤로 한번 넘기더니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첫째가 다섯 살이 되자 왜 아빠와 함께 살지 않냐고 묻기 시작했어요. ‘이제 엄마와 아빠는 사랑하지 않아서 같이 안살아. 사랑 안하기로 한거야’라고 말하니깐, 옛날에는 사랑했는데 지금은 왜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하늬씨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


그때는 노력했던 거야. 그런데 노력해도 잘 안됐어


하늬씨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한참을 더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하늬씨가 아이들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했다.  


“살다보면 상상도 못한 일들이 생겨. 엄마는 끝까지 걸어갈 거야.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너희도 너희 길을 끝까지 걸으렴. 엄마처럼.”


인터뷰 후 나는 집에 돌아갔다. 하늬슬씨도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그녀는 순례길 여행을 하던 사진을 한 장 보내주었다. 사진 속에서 하늬씨는 조금 슬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훗날 하늬씨가 장성한 자녀들과 또 순례길을 걷게 될 것 같았다. 과거 하늬씨가 홀로 보았던 아침 해를, 그때는 세 식구를 함께 보게 되겠지. 그리고 그들을 휘감은 태양빛은 볼을 덥히며 ‘행복’을 속삭일지 모른다.


사진=하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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