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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스토리

세 번째 증언

③편 나는 쓰러져도 좋아요. 내 피로 형제들을 살려주세요

by 김양균의 코드블랙


(1980년) 5월 18일 전국 일원 비상계엄 확대. 새벽 0시. 공수부대원이 소아과 주치의실에까지 난입하여 수색을 했다. 아침, 시내는 평온했다. 야유회를 다녀올 수 있을 정도. 낮. 공수부대들이 전남대, 조선대, 송원전문대 등에서 학생들을 구타했다. 금남로 충장로 동명동 등에서 산발적 시위. 이후 공수부대의 무차별 난타 시작. 참상.

5월 19일. 피의 월요일. 공수부대들 무차별 살육. 닥치는 대로 때린다, 찌른다. 남녀노소 행동거지 불문코 때리고 쏘고 찌른다. 오후, 젊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 구석진 곳에 숨어있다 갑자기 튀어나와 걸어가는 사람을 두들겨 패 끌고 간다. 무차별 학살. 그래도 총칼 앞에서 시위는 끊이지 않는다. 응급실에는 주로 경상 환자들, 조대부고 학생이 장갑차에 오르다가 복부 총상을 입었다.


5월 20일. 오후, 총상 환자가 들어오고 있다.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깨어져 들어오고 있다. 시위대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초기에는 학생 데모였는데 이제 아줌마, 아저씨,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 시위대이다. 중학생, 국민학생도 있다. 아니더라도 모두 길거리에 나와 박수와 성원, 밥 해주고 돈 걷어주고 물 뿌려주고 음료수 주고 태극기를 걸어준다. 3시경, 공수부대가 갑자기 시내에서 사라졌다. 도청에만 모여 있다는 소식.

5월 21일 석가탄신일. 아침, 거리는 조용하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 많은 차량이 동원되고 있다. 시내버스, 스쿨버스, 관광버스, 광주고속, 자가용, 영업용 택시, 군용 지프, 트럭 20대, 마이크로버스, 남선연탄 용달차…. 온갖 차량에 머리띠 두른 시민들 가득 태우고 함성, 함성. 거리마다 함성소리. 국민학생 시위대도 출연했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계엄군의 완강한 저지선, 도청으로….


낮, 갑자기 병원이 소란해졌다. 사람들은 거의 넋이 나갔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를 한 것이다. 밀려드는 사망자와 중상자들. 승용차에, 트럭에, 때로는 리어카에 실려… 총상 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후배의 눈에 핏발이 섰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응급실을 가득 메우고, 그대로 부족하여 병원 정문을 닫고 로비에 환자들을 눕히기 시작했다. (중략) 이어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시민들의 무장 시점이, 적어도 1980년 전남대병원 소아과 주치의의 일기장에는 계엄군의 발포 이후라고 분명하게 적혀있었다.


병원 옆에서 갑자기 총성. 모두 놀랬다. 공수부대 다시 작전 재개인가? 아니다. “아군이다.” 이때 시민들의 환호, 박수 소리. 화순 나주 등지의 무기고에서 무기 획득, 무장하다. 저녁 8시경, 일곱 여덟 대의 군트럭 장갑차가 갑자기 허공에 위협 난사하며 학동 쪽으로 질주했다. 마침내 공격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퇴각하며 한 짓이었다. 그들은 전남대병원 앞을 통과하면서, 병원 응급실까지 최루탄을 던지고 달아났다.


5월 22일 (중략) 다시, 고립무원의 광주. 어쩌면 공포의 광주. 군대가 진압할 힘이 없어 이처럼 조용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얼마만큼 쑥밭을 만드느냐 그 정도를 결정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과연 얼마만큼 죽이기로 작정 했을까? 천명? 만 명? 아니면 십만 명? 헬리콥터가 계속 떠다닌다. 지구전이다.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틀림없다. 이제 와서 무릎 꿇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화면 캡처 2022-08-31 155758.jpg 사진=다큐멘터리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중에서 갈무리


5월 26일. (중략) 오후 3시, 다시 도청 궐기대회. 며칠째 여전한 바람소리. 시민군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계엄군이 곧 들이닥치리라는 사실. 오늘은 이미 궐기대회를 9시, 3시 두 번이나 했지 않느냐. 오후 궐기 대회 때 지휘부들이 울먹였다.


“시민들이여, 힘을 냅시다. 힘을 모읍시다. 돌아가지 마세요.”

뭔가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다. “지금 즉시 YMCA로 와 주세요, 모여 주세요.” 시민군의 마지막 절규.


그리고 5월 27일. 새벽 3시, 잠을 깼다. 시내 곳곳을 돌며, 울며 호소하는 여인의 가두방송.


“시민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 나와 주세요. 나와서 함께 싸워 주세요.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투쟁, 10일, 자유 10일 만에 광주의 영광은 막을 내렸다. 3시 30분부터 진입한 계엄군이 5시경, 시내를 장악했다. 간헐적인 총성, 텅 빈 새벽거리에 며칠 전부터 계속된 바람소리. 6시 넘어 병원 앞으로 탱크 2대 통과.

6시 35분 라디오에서 현재의 작전상황 보도가 나왔다. 폭도 생포 207명, 사망 2명…. 나랏님께서 배포해 주신 자료이다. 공무원은 7시 30분까지 출근할 껏. 아니하면 반군으로 간주, 시민 및 외국인의 외출 금지…. 그리고 음악 ‘콰이강의 다리’가 흘러나왔다.


적고 있는 동안 다시 눈물이 났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 나와 주세요. 나와서 함께 싸워주세요”하던 그때, 의사이기 전에 분명 ‘젊은이’였던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화면 캡처 2022-08-31 155725.jpg 사진=다큐멘터리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중에서 갈무리


결국 5월의 광주에서 의사들이 ‘했다’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밖에 없다. 외과파트의 동료 주치의들이 몇 날 밤을 새며 수술을 했고, 그것이 5·18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작은 역사임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사들의 그날의 노고는 기실, 양동시장 아줌마들이 시민군에게 물 뿌려주고 떡 넣어주던 마음, 혹은 총탄 흉흉거리는 병원 마당에 헌혈하겠다고 몇 시간씩 줄 서 기다리던 시민들의 행동들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5·18에 관한 한 나의 기억은 언제나 그날, 5월 21일의 헌혈 대열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쓰러져도 좋아요. 내 피를 뽑아 우리 형제들을 살려주세요’하던 그날의 시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5·18의 성격을 규명하는 명확한 잣대의 하나라고 믿는다. 그날 병원을 찾았던 여인들이, 중학생들이 과연 정치를 알았을까? 혁명을 깨달았을까?


여인들조차도 참을 수 없었던 분노의 한 표현이었을 뿐이다. 아이들조차도 참을 수 없었던…. 그 순간 표현할 수 있었던 방법이 헌혈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만약에 저희들 앞에 총이 놓여 있었다면… 아이들은 분명 총을 들었으리라. 그리고 쏘았으리라. 저 무지한 폭력과 압살과 만행을 향해. 거침없이. (후략)

(이 글은 전남대병원의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중에서 조석필 1980년 당시 전남대병원 소아과 레지던트의 증언 가운데 발췌하였습니다.)


■ 글 싣는 순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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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증언

세 번째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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