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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Sep 05. 2022

늙은 부부 이야기 [소,우주]

소소한데 우주적인 에세이


태풍이 요란한 날 병원 앞에서 늙은 부부를 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놈의 여편네야! 내가 죽어. 죽어. 크헉. 죽는단 말이여."

 

겨울이 되려면 아직한참이남았지만 늙은 남편은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벌게진 그의 얼굴은 낮에 마신 소주 때문인지 그보다 앞서 의사로부터 들은 청천벽력의 소식 때문인지 여하튼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술때문에 붉어진 코에는 금방이라도 콧물  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늙은 남편이 휘청이자 늙은 아내가 황급히 팔을 낚아챘다.

 

"대낮부터 그리 술을 마시었소. 누가 그런 험한 말을 합디까. 그 의사가 그리했소?"


늙은 남편은 늙은 아내를 쳐다보고는 끄덕끄덕. 결국 콧물 한방울이 또로로록 떨어졌다.

 

늙은 남편은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늙은 아내는 늙은 남편의 팔을 붙들고선 그 광경을 쳐다보고 섰다.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안쓰러움과 분노, 원망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날이었지만 비오는 사진을 쓰기 싫어서..


늙은 남편의 상태가 얼마나 중한지 나는 알길이 없었다. 한편으로 평생을 고주망태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했을 늙은 아내의 심정이 후련할지, 서운할지 나는 궁금해졌다.


늙은 부부도 청춘일 때가 있었다. 손을 잡고 걸었을 골목길. 으쓱한 골목길에서 나눈 서툰 첫 입맛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주말이면 자장면 양념을 잔뜩 묻힌 아이를 중년이 된 부부는 흐믓하게 바라보았을 지 모른다.


늙은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새어나온 외마디. 나는 늙은 아내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육시럴 돌팔이 놈이!"


웃을 상황은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나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스마트폰에는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아내였다.


"비 때문에 속옷까지 다 젖었수. 무슨 비가 이리 온담."

 

새삼스럽게 곁에 누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하늘에 구름은 가득하고 세찬 비가 퍼붓는데 순간 반짝 빛나던 것은 천둥이었을까, 우연히도 구름 사이 햇빛을 엿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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