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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Sep 08. 2022

울지마, 참지마, 이겨낼거야 [소,우주]

소소한데 우주적인 에세이


나이팅게일 선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간호사 윤리 및 간호 원칙이 함축된 이 선서는 4문장의 비교적 단출한 구성이지만, 간호학도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마찬가지로 나이팅게일 선서는 의료인으로서 가져야할 주관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서의 첫 문장이 난 좀 불만이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나서 병원에 취업해 맞닥뜨리게 되는 건 상상하던 것과는 딴 판일지 모른다. 일은 일대로 다하지만, 최저시급은 고사하고 2000원이 채 못 미치는 헐값 노동인력 대우가 사회의 첫 대접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명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열정페이, 어쩌면 노동력 착취.


어디 그뿐이랴. ‘실전’에 투입되면 환자들로부터 막말과 성희롱, 스토킹, 가혹한 노동 강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불안한 고용 안정성은 오죽한가. 이뿐만이 아니다. 성희롱과 성추행, 성폭력의 피해도 역시 이들 앞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로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이 일생을 의롭게 살지 말라는, 좀 이상한 말을 하고 싶다. 물론 '의로움’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의료계에서, 통용되는 ‘의로움’이란 ‘무조건 참고 버티고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악용되기

때문이다. 이걸 부정하라는 거다.


병원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 목소릴 내고 끝까지 싸웠으면 좋겠다. 억지로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대가는 끔찍할 것이다. 왕따를 당하거나 재계약에 실패하거나, 병원에서 해고되거나 타 의료기관 취업마저도 막히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간호사들이 사회가 강요하는 ‘의로움’ 대신 싸움의 기술을 터득했으면 한다. 증인을 찾고 증거를 수집하고, 녹취를 하시라. 의료계가 특히 ‘법’을 유독 좋아한다. ‘법대로 하자’고 나오면, 이러한 기술들이 요긴할 것이다. 이런 지경까지 가지 않길 바라지만.


나이팅게일 선서의 본질, 사회가 원하는 의로움이 아닌, 간호사로서 자신의 양심과 주관에 따른 의로움을 지키기 위한 이 비정한 방법들을, 그러나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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